프렌즈 시즌1 첫 에피소드. 레이첼이 결혼식장에서 왜 뛰쳐나왔는지 아빠에게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내가 신발이 되길 원하는 게 아니면 어쩌죠? 내가 만약 모자나 다른 게 되고 싶다면요?
미드 모임에서 프렌즈 다시 보기를 하다 깜짝 놀랐어요. 언제 적 프렌즈인데! 이 대사가 너무 기억나서, 그리고 자신을 찾으려는 레이첼의 모습에서 떠오른 아이가 있어서요. 당연히 자신이 빨강인 줄 알았고, 다른 무엇은 아닐까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크레용. <빨강 : 크레용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 이름은 '빨강'.
이름으로 소명을 다해 살고 있는 크레용 세상에 있을 수 없는 문제아가 등장했다. '빨강' 이름값을 못한다고 '게으른 거야, 더 노력해야 해, 곧 나아질 거야'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든다.
빨강이는 '빨강'이니까, 꼭 그렇게 해낼 수 있는 날이 올 테니 어서 우리가 도와주자며 애쓰는 크레용들. 자신의 색을 칠하거나, 주변과 색을 섞는 방법을 알려주려 해 보지만 조금의 변화도 없는 빨강이.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더 가열차게 아이디어를 내고 방향을 잡아가며 도와주려 한다.
테이프는 빨강이가 부러졌다고 생각해 테이프로 감아주고, 가위는 빨강이 포장지가 너무 꽉 껴서 그럴 거라며 아주 살짝 잘라준다. 아아 그만해- 외칠 기운도 없는 빨강이에게 연필깎이가 다가와 다듬어주기까지, 마치 우리가 더 도와주면 넌 할 수 있을 거란 신념을 가진 듯한 주변 친구들.
이런 노력에도 빨강이가 '나아지지' 않는다 상심하던 어느 날, 새 친구가 다가와 파란 바다를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닌가.
난 '빨강이'인데 무슨 소리야? 난 못해!
그냥 한번 해 봐!
오 이런, 난 파랑이야!
테이프로 감기고, 조금 깎이고, 겉옷이 살짝 잘렸지만.. 난 파랑이었어! 이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파랑을 그려나간다. 면지 가득 파란 하늘이 채워질 때까지.
읽으면서 안타깝기도, 뜨끔하기도 했던 그림책입니다. 대상이 아닌 나만의 시점으로 행한 어떤 방식의 위로와 조언은 (슬프게도)(가끔은 화나게도) 폭력이 되기도 하잖아요. 저 가위와 연필깎이의 '도움'은 아슬아슬한 손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요.
모두들 빨강이를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애쓰지만 사실 잘못된 방식의 도움이었음을 독자가 천천히 깨닫게 하는 진행이 참 감사합니다. 이를 전달하는 표현 방식을 조절하며 고민한 작가의 마음이 느껴지나요? 파랑이가 되었지만 빨간 옷을 그대로 입혀준 마음 하며.. 구석구석 위트가 넘칩니다.
또한 '파란 바다'를 그려봐, 그냥 한번 해보렴 응원해준 한 사람이 없었다면 고치느라 더 너덜 해진 껍데기를 두른 빨강이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저 한순간이 너무나 고마워서. 언젠가 누군가에게 나도 '해봤니? 그냥 한번 해봐-' 한 아이의 인생을 뒤집을만한 순간이 펼쳐질 수 있는 손을 내밀고 싶어 집니다.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제비꽃의 일이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도 이 꽃이 제비꽃임을 알아챈 이후의 일이겠구나. 우리가 쉽게 이름 붙여 불러버리는 순간 전혀 다른 오해가 시작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미치니 잠깐 멈춰서 생각해본 레이첼을 응원하게 됩니다. 그래 열심히 고민해 봐, 사람들이 너에게 당연하게 입혔던 이미지가 아닌 스스로 찾은 진짜 '매직 빈(*magic beans)'을.
* magic beans: 다음 에피소드에서, 독립한 레이첼이 미래를 걱정하며 내가 가진 것이 매직 빈인지 '그냥 콩'인지 고민하는 것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