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쓰는 걸음

등 뒤의 엄마에게, 징검다리를 놓는다

살아보려는 에너지가 '돌' 하나를 건넨 새벽의 병실

by 시루

‘드르르륵 쾅!’

확 쏟아지는 복도 불빛에 튕기듯 일어나 앉았다. 심장이 내 몸 보다 먼저 간이 침상 밖으로 쏟아질 기세다. 대체 무슨 일인지, 밤새 번갈아 얼음 팩을 꺼내고 수시로 화장실을 오가는 네 개의 침대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하이고 놀래라. 할마시가 왜 저라노. 밤샐라 카네.”

끄응 돌아눕더니 낮은 기침을 삼키는 맞은편 할머니 덕에 원인을 알았다. 문 바로 옆 침대 주인인 구례 할머니가 문이 부서져라 밀어젖히고 나가셨나 보다. 초저녁부터 심기가 불편하셨는데, 간호사가 진통제 주사를 들고 다녀간 후에도 여전하신 걸까. 오늘은 아무래도 짧은 잠 마저 반납해야 할 분위기네.

한숨을 삼키며 돌아보니, 반쯤 가려진 커튼 뒤로 우두커니 그림자가 서린다. 이 소란이 있기 전에 이미 깨어 계셨던 걸까. 천천히 침대 가장자리로 움직이는 그림자.

“엄마도 화장실 가시게요?새벽 4시니까 찜질 한 번 더 할까?”

허벅지부터 보호대로 단단히 고정시킨 다리가 꺾임 없이 내려올 수 있도록 받치며 물어도, 답이 없다. 어둠 속에 나란한 신발을 신겨드리니 웬일로 뒤꿈치까지 수월하게 쑥 들어간다. ‘오늘은 발이 덜 부었네’ 말이 툭 튀어나오다 멈췄다. 병실의 공기란 아주 작은 불편도 쉽게 퍼지는 법이니, 갑자기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들이닥친 팽팽한 긴장감에 나도 그만 말을 아끼고 만다.


역시나, 힘겹게 일으킨 몸을 펴고 커튼을 젖히는 것만으로도 끄응- 소리가 절로 나면서도 함께 나서려는 내게 마른 손을 휘휘 내저으셨다. 걸음 보조대를 밀고 천천히 복도 빛 속으로 사라지는 엄마에게서 눈을 떼고서야, 작은 숨을 뱉고 담요를 정리해 본다. 꼴딱 밤을 새웠던 첫날에 비하면, 설핏 잠에 들었던 듯한 이 새벽은 시곗바늘이 제법 제 속도를 내주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잠시 후 걸음 보조대 바퀴 소리가 점점 병실에 가까워지니, 얼른 문으로 다가갔다. 엄마가 들어오시도록 반쯤 열어놓고 기다리는데 복도 끝 창가에 구례 할머니가 엉거주춤 서 계신 모습이 보였다. 당직 간호사가 있으니 괜찮으시겠지, 걱정 깊어질 새 없이 나도 엄마의 얼음찜질을 위해 공용 냉장고로 조심히 다가가 얼음팩을 꺼낸다. 찜질팩에 꽁꽁 언 팩 개를 넣고 조이는 동안 찍찍이(벨크로) 떼고 붙이는 소리가 여간 눈치가 보인다. 자리에 돌아와 누운 엄마 다리에 찜질팩을 고정했으니 이제 새벽의 마지막 순서가 끝났다. 휴대폰 타이머 30분을 켜 놓고 빛을 등져 돌아눕는다.


타이머 진동이 울리지 않았는데도 눈이 뜨였다. 딱딱한 간이침대 밖으로 떨어진 다리를 모아 움츠리는데 시선이 느껴진다. 엄마가 일어나 앉은 그림자가 내 앞에 떨어져 있다. 블라인드 틈으로 든 달빛이 일렁인 것일까. 필요 없다는 역정에도 기어이 고집하며 올라온 딸을 내려다보는 엄마의 한숨이 일렁인 것일까.


‘저기 문 앞 침대 있지? 아들들 다 몇 억씩 집 해주고, 딸도 엄청 부잣집에 시집을 보냈다더라. 세상에, 복도 좋은 어른이지! 딸 시댁이 어마어마하게 부자라 처음엔 반대를 했다는데 글쎄...’

그새 각자의 ‘썰’을 공유한 분들. 어제저녁 식판을 치우고 앉아 내게도 막 시작하려는 엄마를 타박하며 바로 막아세웠던게 떠올랐다. 남의 시시콜콜 이야기라면 어릴 적부터 귓등으로도 안 들으려는 둘째 딸이 서운해 ‘너도 늙어봐라!’ 하셨지만 그 뒤에 숨은 마음을 알기에 먼저 잘라냈다는 것도 느끼셨을지 모른다.


엄마가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내 이마가 먼저 보일 텐데, 아빠 닮아 흰머리도 빠르고, 주름도 많다며 또 한숨 쉬고 계실 테지. 수술한 다리는 열이 올라 후끈거리고, 옆 침대는 오늘따라 저리 요란하니 속상한 마음이 더 끓어 잠 못 들고 계신가. 몇 억씩 턱턱 내어주지는 못할망정 몇 년째 큰 수술이 이어지며 자꾸 병실에서 마주하는 딸 모습이 쓰리다며 또 혼잣말을 삼키고 계실지도 모른다. 자꾸만 작아지고 스스로 연민하는 마음만 커지면 안 될 텐데, 내일 진지하게 다시 이야기해 봐야겠다.

타이머 알람을 끄고 차가운 찜질팩을 떼어 드리니, 그제야 엄마도 다시 잠을 청하신 모양이다. 딱딱한 간이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커튼 너머를 한참 바라보았다. 달빛이 자꾸만 낮은 그림자를 만들며, 평생을 보아온 엄마를 낯설게 만드는 새벽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종종 생각했다. 세상과 아이들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아주는 게 나의 역할이라고. 원하는 방향으로 호기심을 넓힐 돌 하나를 놓고, 돌 사이의 간격이 너무 좁은지 살펴주는 일이 엄마의 일이라고 말이다. 물론 어린 시절에나 해당되는 일이라는 것 또한 알아가고 있지만, 큰 시야에서는 다를 바 없겠지.

병실 침대 위에 낯설어진 엄마의 그림자를 보며 그 징검다리가 떠올랐다. 내 앞을 향한 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 뒤쪽을 향해서도 돌을 놓아야 할 때라고 문득 깨달은 것이다. 뒤를 돌아보며, 조금 느리더라도 작아진 엄마의 그림자가 닿을 거리만큼의 돌을 하나씩 놓아두기로 한다.

어린 나를 위해서라면 천 길을 달렸을 엄마는, 어두운 병실에서조차 아픈 당신보다 바닥에 누운 딸이 아까워 잠 못 들고 계신 밤. 고요한 돌봄의 마음이 침묵으로 머무른다. 병실의 시간은 느리기도 하지만, 마음을 거꾸로 흐르게 만드는 묘한 흐름이 있나 보다. 자꾸만 어린 시절 내 등 뒤를 지키던 젊은 엄마의 모습을 향해 달린다.


이제 곧 아침이 올 테고, 우리는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흔들리겠지만 그게 우리 모습인걸. 어제 미뤄둔 엄마의 샴푸를 돕고, 면 런닝을 비누로 박박 빨며 개운해하겠지. 엄마 잔소리에 못 이기는 척, 주름 없애준다는 마스크 팩도 하나 주문해야겠다. 나를 위한 징검다리도 하나 놓아가는 거지. 아픔을 이기고 ‘살아가려는’ 병실의 에너지가 내게도 돌 하나를 주었구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제는 우리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