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뒤 돌담까지

도착하면 보이는 풍경

by 시루

뒷마당 돌담 너머로 안개가 물러갔다. 아침 햇볕에 바닥이 바짝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의자 두 개를 꺼내 닦았다. 루게릭병 증세가 심해져 외출이 힘들어진 아빠를 모시고 나올 참이었다. 친정에 와 있는 동안 한 번씩은 함께 햇볕을 쐬자고 약속했지만, 겨울비로 사흘이 지나서야 뒷마당 문을 열었다. 싸늘한 습기가 올라오려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빛에 녹아내린다. 금세 주변이 폭닥해졌다. 아직 마비되지 않은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지팡이를 내려놓는 아빠 옆에서, 해를 향해 얼굴을 조금 더 들어 올린다.


솨아아- 겨울바람이 잎을 쓸고 지나는 소리가 물결친다. 뒷집 작은 귤밭과 닿아 있는 모퉁이, 담장을 넘어올 듯 무성한 대나무 군락에서 흘러온 소리였다. 늘 낯설게 느껴졌던 대나무들의 시원한 흔들림에 마음을 빼앗겨 한참 동안 귀를 기울였다.


“올라갈 때 된장 챙겨가라더라.”

아빠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바로 앞의 장독대를 손끝으로 낮게 가리키고 계셨다. 마당 끝자락 텃밭 앞에 장독대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뒷집에서 높은 방풍 나무들을 모두 없앤 뒤, 나무로 늘 그늘졌던 자리에 볕이 들기 시작하자 매실 항아리와 다른 것들은 실내 창고로 옮겼다고 한다. 이제 마당에 남은 유일한 장독, 저 속에 새로 담은 된장이 들어있다. 지난여름 왔을 때 엄마의 지시를 받으며 깊숙한 곳까지 힘주어 뒤섞었던 된장이 잘 익었다며 퍼 가라는 것이다.

장독에 내 손을 보탠 것은 처음이라 낯설었던 손끝의 감각이 살아났다. 긴 비닐장갑 너머로 차갑고 끈끈한 느낌. 뒤섞인 된장에 공기가 들지 않게 두드리고 비닐로 덮어, 그 위에 소금 주머니를 얹었다. 새하얀 면보를 잘라 입구를 덮고 고무줄을 둘렀지. 탈 없이 익어라, 주문을 외며 뚜껑과 돌을 올려두었던 여름의 일들을 아빠에게 종알거렸다. ‘그러니, 부디 맛있게 드세요.’ 하는 마음으로.


“아빠는 ‘장독대’ 하면 뭐가 떠올라요?”

“뭐긴. 된장, 간장, 자리젓 같은 거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장독대’ 자체의 쓰임 말고, 아빠의 생각이나 추억들을 묻는 내 속이 빤했는지 헛헛 웃으신다.


“너 글 쓰려고 물어보는 거잖아.”

역시, 얕은수는 통하지 않는다. 내가 먼저 저 깜깜한 장독대 안에 있는 듯한 시간을 고백했다. 저 안에서의 일들은 즉시 결과가 나오지 않고 숙성의 시간이 필요한 걸 알지만, 기다림을 전제로 해도 가끔은 막막해지는 마음을. 아빠가 항상 앉아계시는 소파가 아닌 시원한 뒷마당이라서 그랬을까, 일상적이지 않은 고민들이 스르르 말이 되어 나왔다.


힘겹게 손을 들어 올린 아빠가 맞은편 돌담을 가리켰다.

여기서는 저 장독대가 보이지. 그럼, 저 뒷밭 돌담까지 가면 뭐가 보일 것 같아?”

돌담 너머 풍경이 알고 싶으면, 일단 돌담 앞까지 걸어가 봐야 한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위에 올라서는 순간 새 시선이 열릴 테고, 그럼 또 다음 돌담까지 가보고 싶어질 거라는 이야기였다. ‘새로운 것을 보려면 어쨌든 계속 가야지.’ 핵심을 찌르는 위로이자 응원이었다.

매일 글 쓰는 서너 시간을 확보하려 애쓴 건, 아빠 말대로 ‘나아가기’ 위해서였다. 장독대 안 소금 주머니 아래서 스스로 익어가는 시간. 무언가를 반복하는 꾸준함은 삶의 가장자리까지 조용히 스며들겠지. 매일 밟고 지난 땅이 단단해지지 않을 리 없다고, 나는 그 가능성을 믿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돌담까지 가면 뭐가 보일지’ 묻는 아빠의 질문에 나도 답할 수 있었다. 응, 맞아맞아. 작년에 썼던 글보다 더 잘 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글에 뭐가 부족했는지 보이는 ‘눈’ 정도는 생겼다고. ‘그것 봐라!’ 웃으시는 아빠의 얼굴을 그저 바라보았다. 쓰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걸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니 더 넓게 살아보라 해 주시는 말씀에 목이 메인다.


긴 통화도 힘들어 자꾸만 끊으시려는 목소리가 슬펐는데, 와 보니 알겠다. 이제 전화도 멀다. 얼굴을 마주 보고 ‘그래서, 저 담장을 뛰어넘었냐’고 물으실 수 있도록 자주 내려와야겠다.


그러니 아빠도, 여기 더 오래 계셔주세요.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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