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게르만족, 낯선 곳으로 쫓겨 와 나름의 신들과 그 이야기를 만들다
게르만족 일부가 4~5세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들어간다. 그들은 다른 게르만족과 구분하기 위해 북방 게르만족, 즉 노르만족이라 불린다. 노르만족은 기독교로 귀화한 다른 게르만족과 달리 오랫동안 나름의 신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지키고 살았다. 그들은 춥고 메마른 땅에서 살면서 오랜 기간 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덧붙였다. 이에 노르만족 특유의 민족성과 집단 심리가 북유럽 신화에 반영돼 있다.
노르만족을 이해하려면 북유럽 신화를 알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신화에 투영된 북유럽인들의 집단 심리를 이해하면 이번 여행에서 얻는 깨달음과 느끼는 감흥이 풍부해질 것이라 기대했다. 이에 스칸디나비아 3개국(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을 여행하기로 마음먹고 가장 먼저 닐 게이먼 작 <북유럽 신화>부터 사서 읽었다. 민족의 집단적 특성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신화보다 나은 게 없다고 생각했다. 저자 닐 게이먼은 이야기꾼답게 북유럽 신화를 아주 흥미롭게 풀어냈다.
스노리 스튀르를뤼손 작 <에다(Edda)>부터 헬렌 아델린 거버 작 <북유럽 신화, 재밌고도 멋진 이야기>까지 북유럽 신화 관련 책을 일일이 찾아내 읽었다. 책 제목대로 북유럽 신화는 재미있고 멋진 신들의 이야기였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들이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 격인 토르를 영화 <어벤저스>에 합류시킨 이유가 있을게다. 크리스 햄스워스가 분한 토르나 톰 히들스턴이 연기한 로키보다 더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캐릭터를 가진 트로와 로키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멋진 북유럽 신화가 자칫 전해지지 않고 멸실될 뻔했다. 기독교 신앙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들어와 유일 종교로 자리 잡으면서 게르만족 토착신앙과 신화를 거의 말살시킨 탓이다. 북유럽 신들의 자리는 기독교 성자들이 차지했다. 오딘, 토르, 프레이 등 북유럽 신들은 기독교적 논리에 의해 마녀나 악마로 격하됐다.
이 탓에 전해지지 않은 북유럽 신화가 많다. 일부만 민간 설화, 이야기, 시, 산문 형태로 남았다.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은 북유럽 신화를 이단의 기록으로 치부하고 남기지 않았다. 그나마 기록으로 남은 것은 시적 표현이나 관용구였다. ‘프레이야(미의 신)의 눈물’이 대표 사례다. 북유럽 신화 속 아프로디테쯤 되는 프레이야가 금을 눈물로 흘린다. 이에 프레이야의 눈물이라 하면 금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북유럽 신들은 인간 왕이나 고대 영웅으로 지위를 낮춰야 그들의 이야기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행히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아이슬란드로 건너간 이민자들이 북유럽 신화를 보존했다. 아이슬란드 성직자 사이문드르 또는 스칼드가 북유럽 신화와 영웅의 전설을 읊은 운문을 집대성해 <운문 에다(Edda)>를 남겼다. 아이슬란드 역사가 스노리 스튀르를뤼손은 1230년쯤 <운문 에다>를 산문으로 다시 엮은 <산문 에다>를 썼다. <운문 에다>와 <산문 에다>가 없었다면 자칫 북유럽 신화는 멸실되거나 전해지더라도 내용이 훨씬 빈약했을 거다.
노르만족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들어온 계기는 중앙아시아 초원에 사는 훈족의 팽창이다. 말을 타면서 활을 쏘는 유목 민족인 훈족이 4세기 번성하면서 동유럽에 걸쳐 퍼져 사는 게르만족을 학살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특히 5세기 훈족을 통일한 아틸라는 유럽인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신의 징벌(Scourge of God)’이라 불렀을까.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기마부대는 질풍처럼 치달아 동로마제국을 굴복시키고 서로마제국 동북쪽 국경지대에 살던 동 고트족을 복속시켰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서유럽으로 쳐들어갔습니다. 프랑크, 동고트, 서고트 등 게르만족은 신의 재앙을 피해 서로마제국으로 쫓겨 밀려든다. 이른바 게르만족의 대이동.
게르만족 난민 중 일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들어온다. 지금의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 첫 발을 디딘 노르만족은 쫓겨난 고향에서 접하지 못한 기괴한 풍경을 맞이한다. 한밤 중에도 태양이 지지 않고 빛나는가 하면 하늘에는 거대한 빛의 융단(오로라)이 기기묘묘하게 휘돌며 빛났다. 북쪽 절벽은 거대하고 북해의 파도가 맹렬하게 부딪쳐 왔다. 겨울은 다함이 없을 듯 길었고 짧은 여름에는 바다와 하늘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렀다.
노르만족은 나름의 신앙을 만들고 지켰다. 앵글로색슨족이 영국에 정착하자마자 기독교로 개종한 것과 달리 노르만족은 고유의 신들을 숭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스웨덴 웁란드 왕국이 대표 사례다. 웁란드 왕들은 기독교 유일신을 거부하고 수백 년 동안 토종 신을 숭배했다.
초기 신화가 으레 그렇듯 북유럽 신화도 입에서 입으로 이어졌다. 노르만인들은 겨울밤 오로라가 형형한 빛을 발하는 하늘을 보거나 한여름 지지 않는 태양 탓에 잠을 설치며 옹기종기 모여 신의 땅 아스가르드와 거인의 땅 요툰헤임에서 일어나는 신과 거인의 이야기로 긴 밤을 지새웠을게다.
바이킹이 8세기 말부터 11세기 초 해상 정복과 약탈에 나서면서 북유럽 신화는 풍부해졌다.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덴마크에 걸쳐 있는 협강(vik)에서 온 사람이란 뜻이다. 바이킹은 함선 노르(Knorr)를 타고 손에는 토르의 망치를 들고 해외로 신천지를 찾아 떠났다. 이들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정복했고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까지 손에 넣었다. 일부는 북대서양으로 진출해 아이슬란드를 넘어 그린란드까지 진출했다.
바이킹은 북극과 그린란드에 닿은 뒤 고향에 돌아와 신화 속에 나오는 암흑의 땅 니플헤임을 다녀왔다고 무용담을 펼쳤다. 혹독한 추위와 눈도 뜰 새 없이 몰아치는 눈보라로 인간은커녕 신들도 살지 못하는 곳으로 묘사했을 게다. 북아프리카에 다녀온 바이킹은 남쪽에 모든 것들이 빛을 발하며 타오르는 불의 나라 무스펠에 대한 목격담을 전했다. 불꽃처럼 뿜어져 나오는 열기, 흐물흐물 녹는 바위 등 무스펠의 스토리는 바이킹의 전언으로 풍부해졌다.
북유럽 신화는 음산하다. 위트와 유머가 넘치지만 그마저 우울한 비극에 기초한다. 긴 겨울 탓에 햇살에 굶주리고 경작할만한 땅이 많지 곳에서 살아온 노르만족의 집단적 정서가 투영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르만족은 소박하면서도 숭고한 나름의 신화를 만들어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냈다.
<북유럽 신화, 재밌고도 멋진 이야기> 저자 헬렌 아델린 거버는 “고대 스칸디나비아 인들이 자기 신에게 숭고하며 강직하고 위대한 정신을 부여해 높은 수준에 올려놓았다”라고 말했다. 한 인류학자는 “옛 북유럽인의 노래 안에는 진실, 영원한 진리, 위대함이 담겨 있다. 단순히 육체나 크기의 위대함이 아닌 영혼의 소박한 위대 함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여행기에 스칸디나비아 3개국을 돌며 북유럽 신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읊고자 한다. 북유럽에 흐른 호수와 강, 웅장한 산맥과 메마른 땅, 울창한 침엽수림과 낙엽활엽수림, 밤에도 지지 않은 태양과 눈 시리게 푸른 하늘, 빙하가 만든 지상 최고의 아름다움 피요르드 등 신화가 숨 쉬는 자연을 눈에 담고 그 신화의 후손들을 만날 거다. 또 기독교 박해로 박제화한 북유럽 신화의 흔적도 찾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