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위에 뿌려진 문명의 섬들

3가지 샘물이 만든 호수와 강에서 노르만 문명이 꽃을 피우다

by 이철현

9월 중순 어느 햇살 좋은 날 스웨덴 스톡홀름에 들어갔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탈링크 앤 실야가 운행하는 페리(ferry)를 타고 발트해를 건넜다. 편서풍을 맞으며 호화 유람선을 타고 17시간 넘게 바다를 서쪽 방향으로 가로질러야 했다. 유람선 6~11층에는 캐빈(객실)이 촘촘히 들어섰고 캐빈마다 여행객들이 가득했다. 12층에는 바다와 하늘을 볼 수 있는 썬테크가 있어 낮에는 하늘을, 밤엔 별을 볼 수 있었다. 배 안에는 카지노부터 클럽까지 온갖 유흥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7층 플로어에서 재즈 콰르텟(4중주) 공연이 열리고 12층 클럽에선 밤새 술과 춤이 이어졌다.


중국인 2명과 캐빈(객실)을 공유했다. 룸메이트들은 새벽 1시 30분 지나 들어와 부산 대더니 코를 골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 <총, 균, 쇠>를 들고 방을 나왔다. 매번 느끼지만 <총, 균, 쇠>는 대단한 위력을 갖고 있다. 읽다 보면 30분 안에 잠이 쏟아진다. 물론 아주 훌륭한 책이다.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취재력과 통찰에 혀를 내두르며 보고 있다. 그래도 읽으면 졸리다. 1시간가량 읽다 보니 어김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새벽 3시 30분 잠자리에 들기 위해 캐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대륙의 코골이는 소강상태였다. 얼른 잠을 청했다. 잠시 눈을 붙이는 듯싶더니 코골이 합창에 깼다. 새벽 5시 15분 잠을 포기하고 12층 썬테크로 나왔다.

북유럽 신화에 따르면 바닷 깊숙한 곳에서 바다의 신 에기르가 부인 란과 함께 살고 있다. 바다의 여신 란은 자기가 짠 그물로 사람들을 낚아 바닷 깊이 끌고 들어가 죽인다. 바다에 쉴 새 없이 이는 파도는 아기르와 란의 딸들이다. 모두 아홉 자매인 딸들은 조용하고 차분하다가도 배들을 부술 기세로 몰아쳐 전복시키곤 한다. 아홉 자매가 가라앉힌 배에 실린 금은보화는 에기르 궁전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러다 보니 란과 그의 딸은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19세 덴마크 전함은 바닷의 여신 란의 목조상을 만들어 배 앞머리에 달아 놓기도 했다.


란과 그의 딸들이 깊은 잠에 빠졌는지 새벽녘 스톡홀름행 바닷길은 잠잠했다. 뱃사람의 신 뇨르드가 페리의 항해를 지키는 듯하다. 바다는 어둠으로 가득 찼다. 초승달 빛만이 수면 위에 어른거리며 뱃길을 따라왔다. 페리는 수면 위에 프로펠러 추진체의 잔상만 남기고 조용하기 그지없는 바다를 가르며 스톡홀름을 향해 서쪽으로 나아갔다.


이물 쪽으로 가려했으나 바람이 강해 포기해야 했다. 9월 중순 새벽 발트해에 부는 바람은 매서웠다. 바람을 피하려면 배 후미로 이동해 동쪽을 마주해야 했다. 달빛에 비친 바다를 보고 있다 보니 자연은 예기치 않은 전개로 여행객을 놀라게 했다. 하늘이 서서히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밝은 기운은 어둠을 오렌지색과 빨간색으로 하늘을 물들이며 세력을 확장해갔다. 회색 잉크를 풀어놓은 듯한 구름 사이사이에 주황색이 스며들었다. 바다 동쪽 끝에서 큰 불이 난 것처럼 보였다. 저 정도 불이면 떠나온 핀란드가 통째로 타고 있을 게다.

세상 남부에 있다는 불의 지옥 무스펠하임 상상도 <자료= A.J. Carlisle>

북유럽 신화에 따르면 세상 남쪽에 거인 수르트가 지키고 있는 불의 지옥 무스펠하임이 있다. 북유럽판 창세기에 무스펠하임에서 날아온 불꽃들이 하늘로 떠올라해, 달, 별이 됐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무스펠하임에서 시뻘건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햇살은 앞을 가린 구름마저 뚫고 페리 후미에 선 내 앞까지 직선으로 물비늘을 만들고 뻗어왔다. 햇살은 정면으로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했다. 발트해 한가운데서 새벽에 맞은 붉은 햇빛은 차가운 밤바다를 가르며 날아와 눈에, 그리고 심장에 꽂혔다. 무의식적으로 들이킨 깊은 들숨에 가슴이 부풀었다. 같은 광경을 목격한 여행객들이 탄성을 질렀다.


어둠이 다 가시기 전 바다 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갓 떠오른 빛에 실루엣만 드러낸 섬들이 스톡홀름으로 들어가는 내내 줄지어 여행객을 반겼다. 거북이 등껍질부터 혹등고래까지 모양이 가지각색이다. 축구장부터 농구장까지 크기도 다양했다. 섬에 빼곡히 들어선 침엽수나 낙엽수들은 비슷한 높이로 어우러졌다. 크고 작은 섬마다 빨강, 하양, 검정 색으로 외벽과 지붕을 치장한 집들이 새벽 불빛을 냈다. 집 앞에 설치된 접안시설마다 하얀 보트나 요트가 매달려 있었다.


체류 내내 우중충했던 헬싱키와 달리 스톡홀름은 밝게 빛났다. 북유럽 태양의 신 발디르가 낯선 여행객을 반기는 듯했다. 잠을 못 이룬 탓에 피곤했지만 바로 멜라렌 호수가 품고 있는 스톡홀름으로 향했다. 스톡홀름은 스웨덴 남부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흘러 발트해로 나가는 멜라렌 호수의 동쪽 끝에 자리한다. 멜라렌 호수에 뿌려진 섬들에는 스웨덴 사람들이 피운 노르만 문명의 꽃이 화려하게 흐드러져 있었다. 멜라렌 호수가 감싸고도는 육지 쪽 외스트 레 홀름부터 감라스탄, 쇠데르 말름, 유르고르덴 등 크고 작은 섬 14개에 스톡홀름 시민 100만 명가량이 살고 있다.

섬과 섬 사이는 여러 다리가 놓여 걸어 이동할 수 있다. 지하철이 땅 밑을 뚫고 달리고 호수 위에는 페리가 빈번히 오간다. 호수 주변엔 낚싯대를 드리우는 스캔디나비아의 강태공들이 여럿 보인다. 지하철 중앙역에서 내려 감라스탄으로 걸어 들어갔다. 중앙역에서 감라스탄을 잇는 길에는 상점들이 줄지어 서 있고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들끓었다.


감라스탄은 13~16세기 건축물이 가득한 스톡홀름 구시가지다. 걸어서 15분 만에 가로지를 수 있는 이 작은 섬 초입에 스웨덴 의회와 왕궁이 여행객을 맞이한다. 이 섬은 중세시대 건축물과 골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6세기 세워진 대성당에는 용을 짓밟고 있는 세인트 조지의 동상부터 제단, 스텐테인드글라스까지 갖가지 이야기를 품은 유물이 많다.


대광장에 자리한 노벨박물관 안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옥중에서 김희호 여사에게 쓴 엽서가 전시되어 있다. 엽서 겉면에 아주 작은 글씨로 엽서 전면에 빼곡히 써 내려간 글에서 김 전 대통령이 옥중에서 겪은 절박함과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13세기 아이슬란드 학자 스노리 스툴레센이 북유럽 신화를 정리한 <산문 에다(Prose Edda)>에 따르면, 여신 게피온이 멜라렌 호수를 만들었다. 북유럽 신화 길파이닝 편에서 스웨덴 왕 길파이는 여신 게피온에게 농락당한다. 게피온이 여기저기 떠도는 여자처럼 분장한 뒤 길파이 앞에서 그를 즐겁게 하자 그 스웨덴 왕은 게피온에게 소 네 마리가 하루에 쟁기로 갈 수 있는 땅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여신은 거인인 아들 4명을 소로 둔갑하게 한 뒤 아예 땅을 뿌리째 뽑아 바다로 끌고 들어갔다. 그 자리에 물이 차 멜라렌 호수가 생겼다.

여신은 그 땅을 발트해와 북해 사이에 있는 곳까지 끌고 갔다. 게피온이 네 마리 소로 끌고 온 땅은 덴마크 최대의 섬 질랜드(덴마크어로 셀란)가 된다. 질랜드는 그린란드를 제외하면 덴마크에서 가장 큰 섬이다. 인구밀도도 아주 높다. 덴마크인 40%가량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 수도 코펜하겐도 질랜드 동쪽 해안에 자리한다. 이곳애서 북유럽을 호령한 덴마크가 문명의 꽃을 피운다. 호주 남동쪽에 있는 뉴질랜드는 질랜드에서 이름을 땄다.


질랜드 섬 동쪽 끝에 연한 코펜하겐을 바닷물이 흘러 지르고 그 남쪽에 크리스티아니하운이 있다. 코펜하겐은 바닷물을 도심 깊숙이 끌어들여 여기저기 운하를 만들었다. 뉘하운(새 항구)을 따라 운하 끝 양쪽으로 펼쳐진 카페와 술집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특히 밤에는 빨간 조명에 물든 천막 밑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맥주나 와인을 곁들이며 코펜하겐의 밤을 만끽하는 이들로 분주하다. 빨간 조명을 받으며 뉘하운 옆 식당에서 피시 앤 칩스 안주에 칼스버그 한잔 마셨다.


남들 다간다는 인어공주 동상을 보려고 코펜하겐 운하 동쪽 끝으로 이동했다. 가는 도중 네 마리 소를 모는 게피온 석상을 만났다. 게피온 상과 조우는 가이드북에 나오지 않은 터라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 분수 속에 들어앉은 게피온 석상은 카스틀레트 안에 있다. 별 모양의 이 요새는 크리스티안 4세가 1626년 북쪽 항구를 지키기 위해 만들었다. 지난 8월 일본 홋카이도 여행 중 하코다테에서 본 별 모양 성이 떠올랐다. 하코다테 성주는 1864년 도쿠가와 막부파 침공에 대비해 별 모양의 성을 세웠다. 일본 최초의 서양식 성이라고 한다. 하코다테 성주는 카스틀레트에서 성 디자인을 착안한 듯하다.

코페하겐 동쪽 해안 끝 카스틀레트 성의 분수에는 게피온과 거인 소 4마리 석상이 서있다.

카스틀레트 한가운데 자리한 네 마리 소와 그 소를 이끄는 여신 게피온에게서 땅을 뽑을만한 기세와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소마다 팽팽하게 부푼 근육, 발 디딤새, 숙인 고개 등 세심한 묘사가 돋보였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조상 밑에는 북유럽 신화 속 인간계 미드가르드를 감싸고 있는 뱀 요르문간드가 사방에 조각돼 있다.


요르문간드는 로키가 거인 앙그로보다와 바람을 펴서 낳은 세 자녀 중 하나다. 미드가르드를 감싸고 있는 엄청나게 큰 뱀이다. 최후의 전쟁 라그나로크에서 토르와 싸우다 죽는다. 북유럽 신 중 최강의 싸움꾼 토르도 요르문간드의 독을 뒤집어쓰고 9발도 채 걷지 못하고 전사한다. 게피온 석상은 인근 바닷가 바위 위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인어공주 동상보다 완성도나 스토리 면에서 훨씬 돋보인다.


1만 1000년 전 빙하기에 멜라렌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녹지 않은 눈 위에 다시 눈이 내렸고 밑에 깔린 눈은 나중에 내린 눈의 무게에 눌려 얼음으로 바뀌었다. 밑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에 의해 얼음과 눈은 저지대로 흘렸고 그 과정에서 땅을 U자 형으로 파였다.

노르웨이 오슬로 앞바다는 빙하의 침식으로 형성된 피오르 지형에 바다와 호수가 만난 형성됐다.

빙하기가 지나 얼음이 녹자 멜라렌에 바닷물이 들어왔다. 멜라렌은 바닷물로 가득 찬 만이 됐다. 내리누르던 빙하의 무게가 사라지자 땅이 해마다 7.5cm 상승하기 시작했다. 오름세는 줄었지만 지금도 땅은 솟아오르고 있다. 앞으로 1만 년 동안 400m까지 올라온다고 한다. 지금은 호수면이 해수면보다 70cm 높다. 호수면이 해수면보다 높아지자 멜라렌은 지금처럼 산에서 흘러 내려운 담수로 가득 찼다.


스웨덴 문학에서 스톡홀름은 멜라렌 호수의 여왕(멜레라드로트닝겐)이라 불린다. 스톡홀름 시청사 2층에는 멜라렌 호수의 여왕, 즉 스톡홀름을 의인화한 그림이 있을 정도다. 이 여신은 1800만 개 유리와 금박 모자이크로 장식한 방의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작품에서 스톡홀름 여신은 동서양 여러 국가들 가운데 앉아 세계의 균형을 잡고 있다. 이곳에선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 만찬이 끝난 뒤 무도회가 열린다.


황금 방으로 이어진 프린스 갤러리에서는 멜라렌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프린스 유진은 창 너머 보이는 멜라렌 호수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 창 맞은편 벽에 걸었다. 창마다 양쪽 옆에는 북유럽 신화 속 인물을 담은 부조 작품들이 서 있다. 시청사 가이드는 황금 방에 나오는 중세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에 해박했지만 북유럽 신화에 대해선 몰랐다. 가이드에게 부조 작품 인물들에 대해 묻자 창백한 피부에 갈색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긴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북유럽 신화에 알고 싶으면 관련 서적 추천해 드릴까요?”라고 되물었다.


스웨덴에는 멜라렌 같은 크고 작은 호수가 9만 5700개나 있다. 4.7 평방미터마다 호수가 있는 셈이다. 노르웨이도 비슷하다. 노르웨이에선 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호수를 볼 수 있었다. 오슬로 만 깊숙이 파고 들어온 호수에는 바닷물과 민물이 섞인다. 바닷물이 유람선, 어선, 함선이 정박한 항구까지 들어오지만 산에서 내려온 민물과 섞여 짠맛이 덜하다고 한다. 오슬로 앞바다 물을 손으로 찍어서 맛보았다. 간이 잘 맞은 싱거운 소금국 같았다. 비릿한 냄새도 살짝 나고.

스웨덴 어부 조핸은 노르웨이 여자와 결혼해 오슬로 앞바다에서 고기잡이하며 산다.

오슬로 시청사 뒤에 자리한 토르 항구 앞에는 어선들이 밤새 인근 바다에서 잡은 대구, 넙치, 새우 등 해산물을 벌여 놓고 팔고 있었다. 좌판 앞으로 지나가자 뱃사람 조핸이 생새우를 까서 건넸다. 지나가던 여행객들이 좌판 주위에 모여 물고기 이름부터 가격까지 이것저것 물었다. 조핸은 스웨덴 사람이다. 7년 전 노르웨이 신부와 결혼해 오슬로에 자리 잡고 살고 있다.


그는 뱃전을 지나가는 관광객들과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어젯밤 만선의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미국인 관광객 한 명이 “여기 생선들 언제 잡았냐?”라고 묻자 그는 “오늘 밤에 잡았다(We caught them this night.)”고 답했다. 그러자 그 관광객이 “오늘 밤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농담하자 조핸은 “지난밤이다(last night)”이라며 유쾌하게 웃었다. 뭐 그런 식으로 시덥지 않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웃었다.


오슬로 시청 뒤에서 노르웨이 최대 음식 페스티벌(Matstreif)이 열렸다. 해마다 9월 중순에 열린다. 운이 좋았다. 알고 간 게 아니었다. 오슬로 피요르드 유람선을 탈까 해서 오슬로 항구에 갔던 거다. 말 그대로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여기서 생전 먹어보지 못한 노르웨이 각지의 음식을 맛보았다. 엘크, 순록, 사슴, 염소 등 온갖 고기를 소금에 절이거나 스테이크로 굽거나 훈제로 만든 음식을 배 터지게 먹었다. 나중에 입에서 온갖 고기 냄새가 섞여 나는 바람에 바로 앞 카페에 가서 독한 노르웨이 커피를 마시며 입을 진정시켜야 했다.

해마다 9월 중순 오슬로 시청사 뒤 토르 항구에선 노르웨이 최대 음식 축제가 열린다.

다시 행사장으로 와서 노르웨이 빵, 잼, 주스를 마시며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3시간 돌아다니며 200 크로네(3만 원)나 썼다. 과다지출이다. 서둘러 행사장을 빠져나와 항구에 연한 아케르스후스 성으로 이동하려는데 미아가 불렀다. 노르웨이 북부 핀마르크 지방 순록 고기를 맛보라는 거다. 다른 순록과 다르다며 웃으면서 이쑤시개에 꽂아서 고기를 건넸다. 아까 먹은 순록과 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미아의 미소가 달랐다. 이 시골 처녀는 평생 노르웨이 북부 산간 지방에서 자랐다. 이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오슬로에 처음 왔다. 한국 사람도 생전 처음 본다. 난 한국에 대해 미아는 핀마르크에 대해 한참 얘기한 다음 헤어졌다. 해가 지기 전에 아케르스후스 성에 올라 오슬로 항구(토르 항구) 전경을 보고 싶었다.

미아는 노르웨이 북부 핀마르크 지방에서 순록을 키우고 산다. 음식축제에 참석차 오슬로 왔다.

아케르스후스 성에 올라 오슬로 항구를 굽어 보았다. 노르웨이 서부 해안선은 빙하가 만든 피오르로 가득하다. 피오르가 스칸디나비아 반도 서쪽 해안선을 이리저리 파서 해안선이 짜다만 퍼즐 조각처럼 아주 복잡하다. 해안선이 들고 나다 보니 그 길이가 지구 둘레의 절반이나 된다. 해안과 내륙 가리지 않고 노르웨이 곳곳에 빙하가 암석을 깎아 땅 웅덩이를 만들었다. 웅덩이마다 바닷물이나 민물이 차면서 호수가 됐다. 특히 산 정상 주변을 빙하가 침식해 지나간 협곡에는 엄청난 크기의 피요르드 호수가 곳곳에 산재한다.

산 정상에서 비롯된 호수는 산 밑으로 강으로 흐르거나 폭포로 떨어진다. 피오르 협곡마다 양단면에는 하얀 거품을 내고 떨어지는 크고 작은 폭포를 여럿 볼 수 있다. 가장 긴 송네피요르는 204km에 걸쳐 흘러 북해로 들어간다. 뮈르달에서 기차 타고 플롬까지 가는 동안 양쪽에 펼쳐진 피오르 협곡과 플롬에서 베르겐까지 이어진 피오르 호수를 봤다.


기억의 수호신 미미르는 노르웨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기억에 남겼다. 평생 잊지 못할 정물화를. "지금까지 내 눈으로 본 자연 중 가장 아름답다." 오슬로 발 열차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 피오르 관광을 함께 다닌 이민주 씨에게 건넨 말이다. 이민주 씨도 같은 생각이라고 한다. 이민주 씨는 네덜란드 교환유학생으로 헤이그에서 공부하면서 주말마다 유럽 곳곳을 여행하고 있다.


예기치 않은 인연은 여행이 풍부하게 한다. 뜻밖의 동행자와 함께 플롬이라는 기찻길 옆 마을에 내렸다. 피오르 호수를 타라 오를 페리로 갈아타기 위해서다. 이곳은 인구 600명밖에 되지 않은 작은 마을이다. 송네피오르를 가기 위해 이곳에 모여드는 관광객이 해마다 50만 명이 넘는다. 플롬에서 호수 물을 떠 마셨다. 미미르 샘에서 내린 물이라면 노르웨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해서다. 아직까진 플룸을 잊지 못하는 거 보면 약효가 없지 않는 듯하다.

피오르 여행길에 만난 이민주씨는 네덜란드 교환학생으로 주말마다 유럽 전역을 여행 다닌다.

노르웨이 중부 산간지대에 있는 리맨 호수에서 넘친 물은 남부 평탄한 지형까지 흘러 글로마 강과 로겐 강을 만든다. 두 강은 각각 600km와 341km를 흘러 스카게라크 해협으로 들어간다. 두 강을 제외하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눈에 띄는 큰 강은 없다. 자그마한 강들이 계단식 지형을 가파르게 흐르다 남부 평지에서 호수나 피오르로 흘러 들어간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높은 산지는 요툰헤이멘으로 해발 2468m다. 북유럽 신화에서 요툰헤임은 거인의 땅이다. 거인의 땅에서 흘려 내려온 크고 작은 계곡의 물이 스칸디나비아 반도 곳곳에 호수를 만든 셈이다. 요툰헤임에는 미미르 샘이 있다. 현자이자 기억의 신인 미미르가 갖고 있는 샘이다. 미미르 샘에선 땅 속 깊은 곳에서 물이 콸콸 솟아오른다. 미미르는 매일 아침 걀라르호른이라는 뿔로 만든 잔으로 샘물을 퍼서 마셔 지혜로워졌다고 한다.

북유럽 최고 신 오딘은 미미르에게 샘물을 한 모금만 마실 수 있게 빌었다. 미미르는 물을 마시는 대가로 오딘에게 한쪽 눈을 요구했다. 오딘은 주저하지 않고 한쪽 눈을 뽑아 샘물에 던진 뒤에야 샘물을 마실 수 있었다. 그 덕에 지혜를 얻었다. 이에 오딘은 애꾸눈 호아르로 불린다. 바니르 신족은 복수로 미미르의 목을 자른 적이 있다. 오딘은 마법으로 미미르의 목을 깨워 샘에 빠져 있는 자기 눈 옆에 미미르의 목을 놓았다. 그러니 그 샘물에는 오딘의 눈과 미미르 목이 둥둥 떠 있다. 섬칫하군.


미미르 샘에는 세상을 떠받치는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 이그드라실이 뿌리를 담그고 물과 영양을 얻는다. 이그드라실은 물푸레나무로 9개로 나눈 세상을 지탱하고 이어준다. 이에 이그드라실을 세계수(세계의 나무)라고 불린다.


북유럽 신화에서 샘물은 세상과 생명의 원천이다. 미미르 샘을 비롯해 샘물 3곳에서 흘러나온 물이 북유럽의 호수와 강을 만든다. 이그드라실은 3개 세상에 있는 샘에 뿌리를 담그고 있다. 첫 번째 뿌리는 땅 속을 깊이 파고 들어가 암흑과 안개의 땅 니플헤임에 있는 흐베르겔미르 샘에 이른다. 이 샘은 부글거리고 소용돌이치며 독액을 내뿜는다. 여기서 발원한 11개 강이 니플헤임의 차가운 안개를 뚫고 흐른다. 샘에는 니드 호그라는 용이 살면서 이그드라실 뿌리를 갉아먹는다.

마지막 뿌리는 에시르 신족이 사는 아스가르에 있는 샘에 이른다. 운명의 여신 우르드가 이 샘을 소유하고 있다. 이 샘에는 노릇이라 불리는 세 자매가 살면서 이그드라실 뿌리를 돌보고 있다. 세 여인은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한다. 우르드 샘에서 세 여인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샘은 곳곳에 호수와 강을 만들고 신과 인간은 그 물가에서 살아갈 운명이다. 이에 샘의 주인 우르드 여신이 운명을 관장하는 건 일리 있는 메타포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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