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올레는 따스했고 삶의 회한은 더 깊어졌다

누더기 깊듯 하나씩 채워 나가며 걷는 제주 올레

by 이철현

12월9일(수) 20 코스: 김녕 - 하도 올레

전날 늦게 마신 술 탓에 늦잠을 잤다. 제주도 해안도로를 도는 직행 순환버스 101번을 타고 지난주 금요일 목적지이자 코스 20 출발지인 김녕서포구에 다시 왔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밤 늦게 도착했고 바람도 센 탓에 주변 풍경을 볼 여유가 없었다. 오늘은 12월 초순 답지 않게 햇살이 따뜻하고 바람도 없어 김녕서포구에서 스탬프도 찍고 둘러보았다. 배 2~3척 드나들거나 정박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포구였다.

KakaoTalk_Photo_2020-12-13-18-01-54.jpeg 제주 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용암 해변

정오 넘어서 출발한 지라 발길을 재촉했다. 김녕해수욕장, 월정해수욕장, 평대해수욕장, 세화해수욕장까지 4개 모래 해변을 거쳐 제주해녀박물관까지 총 17.6km를 걷는 코스였다. 시속 4km로 속도로 꾸준히 걸으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듯했다. 가끔 샛길로 빠져 낮은 돌담 사이로 걷기도 했지만 이번 코스는 주로 해안을 따라 해변 풍경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코스다. 오늘도 어김없이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 카카오맵에 의지해 다시 코스로 되돌아오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KakaoTalk_Photo_2020-12-13-18-02-45.jpeg 천지 닮았다고 이름 붙여진 소천지가 해안에 형성되어 있다.

이제 걷는게 이력이 났다. 게다가 새로 산 신발이 발에 딱 맞아 편하면서도 빠르게 걸을 수 있었다. 등산화 테크니카 포지GTX는 열성형을 거쳐 내 발 모양에 맞췄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길들이기 만만치 않았다. 일단 길들여지자 성능은 기대이상이었다. 돌 길이든 모래 사장이든 아스팔트든 어느 곳을 걸어도 발목을 단단히 잡아주고 발 바닥을 단단히 지지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거침없이 내디딛을 수 있었다. 역시 비싼게 이유가 있구만.

KakaoTalk_Photo_2020-12-13-18-02-29.jpeg 제주 해안은 한겨울지만 아직 따스하다. 바람만 덜 불면.

코스 20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월정해수욕장이다. 서핑 장비를 대여하고 가르치는 샵이 눈에 많이 띄었다. 청년 7명이 서핑 복을 입고 찬 바닷물 속에 파도타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겨울 바다물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핑 보드 위에서 일어났다 넘어졌다를 반복하며 웃는 얼굴들에 햇살이 부딪혀 해변에 뿌려졌다.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 되지도 않는 진진함에 빠져 이해하지 못하고 체화하지도 못한 책들을 읽겠다고 음습한 동아리방이나 대학교 신문사에 처박혀 있지 않을 거다. 근데 이런 한탄이 무슨 소용 있냐. ㅎㅎ


12월8일(화) 8코스: 월평 - 대평 올레

8코스는 잘 정돈된 해변 길을 걷는 코스다. 호텔 내 올레길을 걷고 중문관광단지 내 아스팔트를 지난다.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워낙 인공적으로 조성된 자연을 좋아하지 않다보니. 특히 주상절리 보겠다고 2000원 내고 들어가지 말길. 공원밖 주상절리와 규모가 조금 컸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걸 2000원이나 받고 올레꾼이나 관광객 출입을 막다니. 바쁘신 분들은 이 코스는 건너 뛰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KakaoTalk_Photo_2020-12-13-18-02-09.jpeg 주상절리 해안. 입장료 내지 않고 볼 수 있는 주장절리가 많다.


12월7일(월) 6코스: 쇠소깍 - 제주올레여행자센터 올레

쇠소깍은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곳이다. 줄을 당겨 나아가는 뗏목 같은 제주 전통 배 테우가 떠다니고 2인승 카누를 탄 연인들이 데이트를 즐기는 곳이다. 바다와 이어진 민물에서 연인과 즐기는 뱃놀이라. 풍경이 중요하겠는가. 상대 눈에 담긴 내 얼굴만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쇠소깍에서 나와 해안을 따라 쭉 걸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빛의 변화가 바다를 어떻게 채색하는 지를 보며 주구장창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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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에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 온 이중섭 일가가 지낸 집이 보존되어있다. 이중섭거리 끝나면 서귀포 매일올레시장이 나온다,

6 코스 도착지 서귀포 시내다. 서귀포 시내에 들어서면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로 피난 온 이중섭 화백 일가가 살던 집이 있다. 이중섭 화백은 이곳에서 1년간 작품 활동하다 부산으로 갔다고 한다. 당시 이중섭 가족이 살던 집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 집을 중심으로 위 아래로 이중섭로가 조성되었다. 이 거리에는 기념품 상점과 카페, 음식점이 자리해 제법 운치있다. 언덕을 올라서면 서귀포 전통 시장도 나오고 작정하고 조성한 먹거리 공간도 나온다.

KakaoTalk_Photo_2020-12-13-18-02-56.jpeg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쇠소깍에는 연인들의 물놀이가 한창이다

목적지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 도착해 커피 한잔 마셨다. 이곳은 유일하게 제주올레가 직접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는데 코로나 탓인지 올레꾼을 찾아볼 수 없었다. 늦게 도착하는 올레꾼이 커피나 맥주를 찾지 않을까 싶어 점원 2명이 썰렁한 카페를 채우고 있었다.


12월6일(일) 9코스: 대평 - 화순 올레

가장 짧은 코스다. 6km에 불과하다. 대평포구에서 화순금모레해수욕장까지 2~3시간 걸으면 끝난다. 초반에 월라봉에 오르는 게 조금 힘들다. 대신 정상에 오르면 제주 남서부 바다가 멋지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파 놓은 진지동굴이 흉측하다. 한 동굴에 들어가 밖을 촬영했는데 하트 모양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금방 도착한 터라 10 코스 돌 때 들어가지 못하고 지나쳤던 원앤온리 카페에 갔다. 이 카페는 산방산을 배경으로 모래사장에 가까운 곳에 위치해 풍경이 기가 막히다. 뒤로는 산방산이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며 웅장하게 서 있고 앞으로는 제주 남쪽 바다가 펼쳐져 있다. 제주 해안가에 있는 카페 중에서는 풍경은 단연 최고다. 커피 값이 너무 비싼게 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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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평전쟁 말기 일제가 파 놓은 진지동굴. 동굴 안에 들어가 찍은 밖 풍경이 하트라 아이러니하다.

12월5일(토) 4코스: 표선 - 남원 올레

19km로 긴 코스이지만 특별히 인상 깊은 곳은 없었다. 제주 남쪽 바다를 지겹도록 보고 걸었다. 제주 해변을 처음 걸을 때는 인상적이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인지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는 제주 바다의 여러 모습을 한번에 볼 수 있었다. 언제 다시 제주 바다를 이리 보겠는가.

KakaoTalk_Photo_2020-12-13-18-02-38.jpeg 제주 해안은 자연이 작정하고 만든 아름다움을 잔뜩 안고 있다

12월4일(금) 19 코스: 조천 - 김녕 올레

19 코스는 19.4km로 만만치 않은 거리다. 제주도에서 삼일절 항일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에 기념비와 공원을 조성한 조천만세동산이 출발지다. 지난달 21일 18 코스를 걸을 때 온 적이 있어 익숙하다. 당시 밤에 도착해 주변 경관을 살필 수 없었다. 대낮에 공원을 둘러보니 제주도 기념 공원 중 가장 큰 곳이 아닌가 싶다. 제주해녀박물관보다 크다.

KakaoTalk_Photo_2020-12-13-18-03-29.jpeg 올레길은 해안을 따라 조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올레길을 걸으면 제주 해안은 질리도록 볼 수 있다.

신흥리백사장에는 만조로 물이 가득해 백사장을 보기 힘들어 출렁이는 파도를 보며 지나쳤다. 눈에 띄는 곳은 함덕해수욕장이다. 두세번 온 적 있다. 제주 북동쪽 해변에서는 가장 번화한 곳으로 해안 주변에 서우봉까지 공원이 멋지게 조성되어 있다. 바다 쪽으로 한참 나간 곶에는 잘 알려진 카페가 있어 소파에 늦어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연인이나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모래 사장과 카페를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함덕해수욕장에 연해 있는 서우봉은 높지 않고 등산로도 잘 정비되어 있어 쉽게 올랐다. 정상에서 함덕해수욕장은 미니어처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19 코스에서 인상적인 곳은 벌러진동이다. 2개 고을이 나누어지는 곳, 또는 지형이 두개로 나누어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벌러진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는 풍력발전단지가 자리하고 있어 아주 가까운 곳에서 풍력 터빈이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하에 나오는 거대한 거인이 팔을 힘껏 휘두르는 양 풍력 터빈의 날개는 엄청난 소리와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간다. 바로 밑에서 보니 상당히 위압적이다. 풍력 발전 터빈이 돌아가는 모습은 멀리서는 봤지만 이리 가까이서 보기란 처음이다.

벌러진동에는 신화 속 자인언트가 휘두를 듯 위압적으로 돌아가는 풍력 발전기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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