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제주는 오감으로 사람을 유혹합니다. 햇살은 옷깃 아래 드러난 목에 고스란히 닿고 바람은 걷어올린 팔을 감싸고돕니다. 옷에 스며든 햇볕은 몸을 데우고 바람은 찬 기운으로 팔에 소름을 돋게 합니다. 시푸른 하늘과 그 하늘을 흠모하는 바다는 옥빛과 코발트빛으로 넘실거리며 눈살을 찌푸리고 일러 핀 벚꽃, 빨간 잎이 지기 시작한 동백, 활짝 핀 매화까지 온갖 꽃들이 지천으로 피워 올랐습니다. 유채꽃의 노란 군무를 뺄 수 없죠. 포구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썩은 바닷물의 비릿함은 콧속을 강제적으로 파고듭니다. 오랜 걸음으로 허기진 상태에서 한입 먹은 몸국은 특유의 걸쭉함으로 느끼합니다.
시푸름 바다 위 바위섬에는 낚시꾼이 홀로 바닷고기를 낚고 있다.
다시 제주에 왔습니다. 문득 치오른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내려왔습니다. 내려온 김에 총 26개 코스 425 km 중 걷지 못한 4개 코스를 걷고자 합니다. 오늘은 16번 코스를 다녀왔습니다. 제주 서북부 고내포구에서 바다에 연한 길을 걷다가 호젓한 숲, 고려의 토성, 돌담 너머 일군 대파밭을 따라 총 15.8 km를 걸었습니다. 살아온 날에 대한 회한과 앞으로 선택에 대한 번민은 사라지지 않고 딛는 발자국마다 따라왔습니다.
고내포구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바닷물이 썩어서 내뿜는 악취에서 도망치다시피 빠져나와 해안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구암마을까지 4.5 km 가량은 봄 바다의 시푸른 푸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바닷물은 돌무더기 해안에 부딪히며 일렁일 때는 투명하지만 해안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시푸르러집니다. 코발트빛을 지나면 옥빛으로 반짝이는 지대가 곳곳에 자리하고 그 너머에는 하늘을 닮은 바다가 선 하나를 그으며 하늘에 닿습니다.
지금 제주에는 일러 핀 꽃들이 한창이다.
구엄 어촌체험마을에 밀집한 온갖 맛집들을 만나면 코스는 동쪽으로 90도 꺾어져 육지로 파고듭니다. 돌담으로 구분지은 대파밭들이 이어지고 그 길 끝에 오름과 숲이 펼쳐지는가 하면 다시 마을이 나타납니다. 육지 제주가 안고 있는 전형의 풍경이었습니다. 늑대인지 개인지 구분하기 힘든 무시무시한 개들의 합창을 견디며 힘겹게 골목을 서둘러 빠져나오면 망해버린 왕국의 잔해, 토성이 이어집니다. 몽고와 고려 연합군을 막기 위해 쌓은 삼별초의 토성은 서글프게 가녀린 용태를 숨기지 못한 채 힘겹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걷는 내내 발밑을 지탱하는 대지와 옆에서 동행하는 돌담길 안에 생명이 출렁거리고 있음을 느낍니다. 3월 중순 햇볕에 녹아 땅 위로 스며 올라와 흙을 질척이지만 그 안에 새로 생명이 움트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겨우내 얼어붙은 땅 속 얼음이 봄의 기운에 증발해 헐거워지자 그 빈 공간을 수분이 스며올라와 채웁니다. 토성은 그 헐거움 탓에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대파를 수확해 등짐 하나 지고 일어나는 늙은 아낙의 얼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고요.
얼마나 더 있어야 충동적 그리움을 삭힐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제주의 봄이 진하게 내뿜고 있는 커피 향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다시 서울의 일상이 그리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