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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현 Jun 15. 2023

눈길 밟고 높이 얼룩무늬 산 레이니어에 오르다

6월13~14일 설원 위에 솟은 활화산의 미모에 흠뻑

지난밤 과음한 탓에 운전한 지 한 시간 만에 운전대를 나윤에게 넘기고 뒷자리로 넘어가 졸았다. 술의 힘을 빌어 동행 사이 갈등은 얼마간 봉합했지만 포틀랜드 산 수제맥주를 너무 많이 마셔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 준수는 속에 탈이 나 설사까지 했다. 뒷좌석에서 한참 졸다가 눈을 떴다. “우와~ 대박!” 눈 안으로 한가득 들어온 레이니어 산의 절경에 감탄했다. 검정과 하양이 명징하게 뒤엉켜 흡사 범고래를 연상시키는 설산이 눈앞에 버티고 있었다. 

레이니어 산은 미국 워싱턴 주 중서부에 있는 높이 4392m 화산이다. 캐스케이드 산맥 최고봉으로 수세기 전 분화한 흔적이 있는 사화산으로 만년설에 뒤덮여 있다. 방문자 안내센터에 들렀다. 안내 직원에게 트레킹 코스와 뷰포인트를 추천받았다. 레이니어 국립공원 안에서 여행객이 많이 찾는 곳은 파라다이스와 선라이즈 구역이다. 

우리는 레인저 추천대로 파라다이스 설산 트레킹 코스를 다녀오기로 했다. 조금씩 녹고 있는 눈 위를 걸어 레이니어 산 앞 전망대까지 2km가량 오르는 구간이다. 포틀랜드가 따뜻해 늦봄 같았는데 얼마 올라오지 않은 레이니어 산은 겨울이었다. 산봉우리에서 내려오는 찬 바람을 몸으로 받으며 설원을 밟고 올랐다. 눈 녹은 물이 산자락으로 흘러 내려왔다. 고개를 들면 하얀 눈밭에 검은 얼룩이 물든 모양의 설산이 흰 구름을 이고 버티고 있었다. 눈을 밟고 한참 오르다 뒤를 돌아다보면 멀리 캐스케이드 산맥을 이루는 설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설원 위에 길게 솟은 푸른 침엽수림이 자리하고 그 너머로 얼룩이 모양 산들이 병풍처럼 늘어선 절경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눈이 잦아지고 바위와 흙길이 나오자 다람쥣과 설치류 마못이 껑충거리며 앞으로 지나갔다. 레이니어 산에는 마못이나 다람쥐 같은 설치류가 많이 서식한다. 생전 처음 보는 마못을 신기해하며 오르자 이번에는 다람쥐가 나타나 코 앞까지 다가왔다. 잠시 쉬던 중 성재가 단백질 초코바를 꺼내자 다람쥐는 대담하게 우리 일행 앞으로 다가오며 애타게 초코바를 바라봤다. 조금 떼어 주고 싶었으나 야생동물에게 음식을 주지 말라고 경고문을 떠올리며 다람쥐의 애타는 시선을 무시하며 다시 눈밭으로 발길을 돌렸다.

레이니어 산 전망대에 다가갈수록 바람이 세졌다. 위에서 내려오는 트래커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오르다 보니 금세 전망대에 도착했다. 더 오르고 싶었다. 레이니어 산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었다. 조금만 더 하며 산봉우리 쪽으로 몸을 기대며 눈밭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하산 시간을 계산하니 더 오를 수 없었다. 설사 탓에 산에 오르지 못하고 공원 호텔 커피숍에서 준수가 우리 일행의 하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쉬움에 입맛만 다시다 내려왔다. 준수를 태우고 차량으로 주요 뷰포인트를 돌아다녔다. 푸른빛 호수, 짙은 녹색의 침엽수림, 비탈에 피기 시작한 노란 야생화 밭, 그 너머로 펼쳐진 설산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절경을 찾아다녔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절경을 보아서인지 레이니어 산은 레드우드와 요세미티 못지않게 깊게 뇌리에 각인되었다. 다음날 다시 오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 준수 성재 순으로 숙소에서 하루 쉬고 싶다며 산행을 포기했다. 연일 강행군하다 보니 다들 지친 듯했다. 오로지 나윤만이 짐을 챙겨 레이니어 산으로 간다며 나섰다. 나도 하루 쉬며 재정비하고 싶었다. 


앞으로 15일 남았다. 100일 넘는 여행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남미 중미 북미 곳곳에 있는 어려운 트레킹 코스는 다 돌아다녔으니 지칠만했다. 빨래도 하고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며 하루를 그냥 보냈다. 다음날 드디어 옐로우스톤으로 향한다. 미국 횡단의 하이라이트다. 옐로우스톤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하루 쉬며 재충전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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