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저, 먹먹했다.
상처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던진 막말들이 남아서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상처를 회복하고자 그를 이해하려 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상황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내가 왜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가 그럴만했던 것일까. 내가 지나쳤던 것일까. 아니면 이번엔 그가 지나쳤던 것일까.
그리고 하루가 지나자 그녀는 괜스레 모든 것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딱히 그와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그런 것이라고 인지 조차 되지 않는데, 이유 없이 자꾸 화가 났다. 애먼 호르몬 탓으로 돌려보고도 싶어서 지워버렸던 생리 다이어리 어플까지 찾아서 생리 주기를 확인한다. 아니다. 오늘은 무려 한 달 중에 호르몬 영향을 안 받는다는 단 6일에 들 만큼 아무 영향이 없는 날이다. 그렇게 화를 내면서 휴대폰을 자꾸 확인한다. 안다. 그는 절대로 먼저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러 나서기보다 상대가 해결하러 올 때까지 무한한 인내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실을 그렇게나 뻔히 잘 알면서도 하루 종일 휴대폰을 다시 확인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그녀는 바로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자꾸만 화가 나는 것이다.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을 그에게, 이러다가 결국 자신의 마음 편안함과 안도를 위해 또 먼저 나서게 될까 봐, 그저 기다리면 되는 그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왜 이모양인 것일까. 모든 연애사는 뻔하다. 한번 고착화된 무엇인가는 쉽게 바뀌기 않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것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그 관계를 끝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쉬운 방법을 택할 수 없어서 수많은 고민과 고뇌와 눈물과 술잔이 소비되는 것일 텐데, 그렇게 찾아진 결론이란 보통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귀결되고 만다. 한쪽이 그저 참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참는다는 것은 마음에 쌓인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녀는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 아니, 좀 누그러졌다. 그리고 점점 더 누그러질 것이다. 딱히 무언가 상황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았다거나 이해의 정도가 달라져서가 아니다. 그저 현실과 시간 흐름의 축복에 묻혀 좀 덤덤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나면 그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그렇게 죽을 것 같던 시간과 고민이 무색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좋았던 기억 행복했던 순간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것이고, 그래서 우울해질 것이다. 그 행복의 기억들은 과거에 있는데 그 과거가 현재와도, 그리고 미래와도 이어지지 않을 위기에 처해있다. 행복의 확대 재생산이 불가능한 상황. 그 상황에서 인간이 우울해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이제 그녀의 선택만이 남았다. 행복의 확대 재생산을 꿈꾸며 그보다 훨씬 더 높은 확률로 반복적으로 발생할 것이 뻔하디 뻔한 불행의 확대 재생산을 감내한 채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이제까지도 늘 해왔던 가장 쉬운 선택, 현상유지. 내일의 불행은 내일의 자신에게 떠넘기고 당장의 행복 회로의 단절을 시한부로 막아 볼 것인가.
저요, 저요. 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 것만 같아요. 현상유지를 선택합니다!
왜 일까. 왜 그렇게 부질없는 선택을 반복하는 것일까. 현상유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경우의 다음 단계, 우울과 절망, 좌절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심지어 그 우울과 절망, 좌절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기약조차 없기 때문에? 그래서 너무 오랜 기간 동안 괴로울까 봐 겁이 나서? 그렇지만 그녀도 안다. 그것은 결국, 끝이 있다는 것. 결국 그 고통은 끝나기 마련이고 끝나고 나면 그 불같았던 감정 조차 기억나지 않는 순간들이 올 것이라는 것. 늘 그래 왔고, 또 그럴 것이라는 것.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끝은 올 텐데 그 시간을 좀 더 유예하기 위한 부질없는 선택의 결과란 행복의 기억을 축적하는 것과는 비하지 못할 속도와 질량으로 불행의 기억을 축적하게 되는 것이라는 걸.
그러나 문득, 깨닫는다. 그녀는 어떠한 관계든, 정말로 끝난 시점보다 그 종료의 시간을 앞당겼더라면 하고 후회한 적이 없었다는 것. 그것은 정말로 완전히 관계의 연이 소멸한 시간에 완벽히 끝났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늘 그 관계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그 관계와 끝맺음을 복기해본 적이 없을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부터 해볼 참이다. 늘 서툴기 그지없는 그 모든 관계의 맺음과 이음, 끝맺음이 어떤 시점이어야 하는지, 했는지, 할 것인지를 한번 가늠해보려고 한다. 그것이 또 하나의 답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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