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부터 기인하지 않은 것
육아를 하다 보면 소모되는 것이 더욱 많은 것 같지만, 가끔 아이의 모습을 거울 삼아 깨달음이 오는 순간이 있다. 오늘 아이와 함께한 오전이 그랬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아이의 아침을 먹이고 난 시간이었는데 유난히 힘이 빠지고 기운이 없었다. 어찌해야 하나 하고 공간을 방황하다 문득 아이와 함께 있을 때면 잘 들어가지 않는 공간인 서재로 들어가 의자를 젖혀 앉았다. 뭔가 본능적으로 나의 공간을 찾아들어간 것이었을까. 늘어져서 의자를 젖히고 누운 엄마를 따라 들어온 아가는 처음엔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 듯 보였다. 변함없이 의자 곁에 와서는 매달리고 책을 읽어달라고 하고 장난감을 꺼내 달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의 표정과 행동에서 변화가 느껴졌다. 무언가 시무룩한 표정. 아이는 눈치챈 것이다. 엄마가 나랑 지금 놀려고 하지 않는구나. 저 의자 위에 얹혀 늘어져 있는 엄마는 나와 함께하기보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구나.
깨달음은 여기서부터다. 나는 같이 있는 사람과 함께 무언가 하고 싶은데 상대가 그럴 의사가 없어 보인다.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내 아들은 나보다 나았다. 처음엔 살짝 시무룩해하더니 곧 혼자서 무엇인가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아직 세 돌이 안된 아가에게 그런 일은 흔치 않아서 나도 결국 유심히 보게 되었는데, 밖에서 자기가 가지고 올 수 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오고, 혼잣말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어제의 기억을 엄마를 보며 해실 해실 웃으며 이야기하기도 한다. "비가 와서 우산 썼잖아! 준비, 시, 작! 하고!". 물론 그런 시간이 오래가진 않았다. 한 20분이었을까, 혼자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마친 아들은 결국 엄마에게 당당히 요구했다. "엄마 이제 내려와!"
나는 감정적인 인간형이고, 나 스스로의 감정을 기민하게 느끼는 만큼 타인의 감정 변화도 예민하게 느끼는 편이다. 아니, 굳이 느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것이 때론 피곤하기도 하다. 배려의 탈을 쓴 상대의 행동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감정의 이면을 눈치채는 것. 그래서 막연한 타인이 아닌 내게 가까운 사람, 내가 함께 무엇을 하고 싶은 사람이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거나 나로부터 무관심해지면, 혹은 그저 무기력해하면 그 순간은 아무리 포장되어 있어도 곧바로 나에게 느껴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느껴지는 그 순간이 나에겐 늘 '아프다'. 왜 아플까. 아마 그것이 나라는 사람이 상대에게 아무런 흥미를 주지 않는구나, 내가 그럴 만큼 매력적이지 않구나, 혹은 나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상대에겐 좋은 순간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오기 때문인 듯하다.
저 생각의 로직은 얼마나 우스운가. 내가 서재방에 누워서 혼자이고 싶던 순간은 아가의 예쁨과는 무관했다. 아가는 평소와 같은데 그저 나 자신이 다른 이유로 여력이 없었을 뿐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아가와 같이 즐거운 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러기에 아가가 가진 예쁨은 나에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상대의 무관심과 무기력은 나, 혹은 아가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아가는 상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굳이 애를 쓸 필요가 없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아니, 애당초 그 원인을 상대가 아닌 '나'에게서 찾을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아파할 이유가 없다. 아픔을 느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늘 아픔을 느껴왔다는 사실이 오히려 아프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제는 나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괜찮아. 네가 아파할 일이 아니었어. 너는 어느 순간에든 '너'이고, 그 자체로 괜찮으니 더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너로 충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