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춘몽의 시작

일장춘몽 eps.2

by 시선siseon

시작 - eps.2


그녀는 언젠가부터 글 쓰는 것이 좋았다. 처음에는 글쓰기라기보다 문서를 만들어 내는 것에 가까웠는데, 하다 보니 제법 자신이 문서를 만드는데 적합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남들은 허례허식이나 의전 따위로 치부하는 '공무원 양식의 글쓰기'가 오히려 그녀에게는 가장 쉽고 마음에 드는 양식일 줄이야. 그렇게 문서를 생산하고, 타인의 문서를 수정하면서 제법 희열을 느끼던 그녀는 그래서 다른 글쓰기도 해보고 싶었다. 문서를 생산하던 당시 그녀가 쓰는 글은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을 때 끄적이는 매우 간헐적인 블로그 글쓰기 정도에 불과했는데, 일 년에 몇 개 남겨지지 않은 글로도 기록이 되고 후에 다시 읽어보니 제법 그 당시의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어 꾸준히 써보자 했다. 그러나 하루가 잘 써지면 다음날은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는 일상이 반복되자 그마저도 그만둬 버렸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무려 '돈 내고 글 쓰는' 프로그램이었다. 매일 무엇인가를 쓰는 것은 일기라 할지언정 3일을 못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는데, 우연히 발견한 블로그 글에는 100일 동안 매일 글쓰기를 한 후 발견한 자기 자신의 변화가 소상히, 매우 현실적으로 적혀있었다. 무엇보다 와 닿았던 것은 '글 쓰는 근육'이 생기더라는 것. 그래. 그것이었다. 그녀가 갖고 싶은 것. 글을 쓰고 싶은데 문서가 아닌 글을 쓰려고 앉으면 손 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어색함을 극복해야 하는, 혹은 '잘 쓰인' 글을 쓰고 싶은 욕심에 몇 자 썼다가는 마음에 안 든다고 때려치워 버리는 그런 자신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 그래서 일단 소심하게, 30일 글쓰기 프로그램을 신청해 본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일은 거의 그녀 인생의 전환점 수준의 사건이 되었다. 30일 글쓰기는 또 다른 30일 글쓰기로 이어졌고, 급기야 365일 글쓰기를 도전하기에 이른다. 매일 글을 쓰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그녀에게 일상의 최고의 유희이자 스트레스 해소, 불안을 잠재우는 마법과도 같은 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하루를 살아내고 난 일상의 찌꺼기를 배출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천성이 사실은 긍정적인 그녀가 글을 마무리하는 방식은 찌꺼기를 배출한 자리를 담담한 희망으로 채워놓는 것. 일상을 관조하고, 그래서 일상의 꼬인 실타래를 풀어놓는 일을 매일 반복한다는 것은 그녀의 글에 - 그리고 일상에 - '행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었다.


물론 일상 자체가 순탄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복잡 다사다난한 하루는 한치의 변함이 없었더랬다. 그래도 글쓰기라는 표현과 배출의 통로가 있어서 하루의 끝이 좀 더 순탄해졌으니 그게 어딘가 했다. 그래서 어느 날쯤에는 한 시간 정도 글을 쓸 시간만 있었다 하면 - 적당한 클리쉐의 하루였다는 전제하에 - 그게 어떤 하루였든 그냥저냥 다 괜찮다 싶기도 했다. 이 정도의 변화라니. 하루의 마지못한 일과 중 하나로 시작했던 글쓰기가 이제는 버젓이 최고 우선순위의 주인공 자리를 꿰찬 것이다.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으련만.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확연하다. 욕심이 과했던 것일까. 글쓰기가 가져다준 변화에 취해 그녀가 꿈꾼 것은 그 변화의 기쁨조차 다시 앗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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