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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희 Jul 12. 2023

비스듬히

#2023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외 추가작-2

(2022 인천문화재단 예술표현활동 지원선정 시집 중) 


빗살무늬토기에 대해서 배우고 있을 때 창밖에서는 바람에 걸려 삐딱하게 내리는 비가 있었다 

무늬는 점점 기울어 바람의 방향으로 누웠다     


비스듬하다는 것은 안정적이라는 말의 동의어

지구의 축이 꼿꼿이 선다면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예언이 들어맞는 것이고 

기울기 없는 해안선이라면 직사각형의 바다를 만들 것이다

별똥별이 지는 것도 비스듬하고 새들도 비스듬히 난다

기울어 피는 꽃이 아름답다는 신문의 사설을 읽었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갈대가 누운 각도에 따라 노을도 다른 숨을 쉰다는 점에서는 그 기억이 옳다     


남자의 어깨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댄 여자나 여자의 등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남자를 보는 일은 불안하지 않다 

사이클 경주의 트랙은 기울어 있고 달리는 자전거는 기울어 달려야 넘어지지 않는다

비스듬히 생각해야 대체로 많은 것들에 여유가 생기는데 

느긋한 오후의 햇살이 사선으로 내릴 때처럼 혹 나른해도 잠깐의 졸음이 단맛임을 알게 되는

이 법칙을 ‘비스듬히’라고 명명한다

     

창문을 슬쩍 밀어 열어놓았더니 하늘이 비스듬히 쏟아져 내린다

고공을 무서워하면서도 비스듬히 사다리를 놓아 오르기로 한다

남들은 이 짓이 기운 운동장에 서는 것 같다 하지만

한해가 기우는 마당에, 한 발을 올려 딛는다   

  

시제를 ‘비스듬히’라고 정하고 나서 자판을 두드리는데 

왼쪽으로 기우는 머리

좌뇌가 더 무거운 듯하여 소질이 없는가 싶기는 한데

일자목은 아니니 다행이지 싶고

빗살무늬토기보다 더 해묵은 시상이지만 이것도 나름 ‘시’가 되리라 믿어

써 놓고 보니 너무 정색이어서 좀 삐딱하게 다시 쓰기로 한다

우체국은 비스듬한 언덕 아래, 오후 6시에 문을 닫는다     


늘 비스듬히 기우는 시계바늘처럼 

오늘 하루도 여지없이 비스듬하게 기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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