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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희 Oct 06. 2023

삐에로가 있다

#2023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7

삐에로는 고깔모자를 쓴 채 자전거 페달을 연신 밟았다

무대 위에서 공전하는 외발자전거

바퀴살에 바짓단이 걸려 넘어지면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실수를 고의로 가장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삐에로이므로 박수를 쳤다


텅 빈 객석에 나뒹구는 조악한 플라스틱 의자들

하나씩 일으켜 세우며 

삶이란 다 이런 거지 뭐, 하면서 하루를 지우고

벌점 하나 추가받은 날, 깎인 일당만큼의 소주를 들이키면서 

삶도 그렇게 돌고 도는 거라고 한다고

단역 김씨의 유일한 대사를 훔쳐와 모노로그를 시연한다     


삐에로는 있다가 없다


유랑서커스가 사양길에 들어선 지 오래 되었어도

삐에로는 날짜를 세지 못 한다

홀로 남겨진 날에 낡은 천막을 치고 걷기 시작한 후부터

이름 석 자 대신 삐에로라 불렸다

삐에로는 삐에로일 뿐, 대필된 계약서에 이름이 없다


무대 끝이 낭떠러지처럼 보일 때

내쳐 달리면 하늘의 끝자락에 닿을 수 있을까

그저 아무도 없는 곳에서라면

엎어져도 조각난 달빛 짚고 일어설 수 있으련만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닿을 수 없는 곳

거기 사람들은 입장권을 사고, 팝콘을 사고

삐에로는 팔린 노예처럼 남의 임금을 번다


송도 가는 길목, 황량한 나대지에서 펄럭이는

철지난 천막 속에서

달린다 밤낮없이 달려도 그 자리인 주행

공전하는 삐에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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