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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희 Oct 06. 2023

하루를 접는 법

#2023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5

그림자를 두고 온 날은 주머니 속이 서걱거리곤 한다


아무 이유도 없이 기운 저녁이 

달팽이처럼 움츠린 채 바람을 허파에 재울 때

생각나지 않는 목적지를 억지로 기억해내면서

그림자의 운명을 생각한다     


어제의 그림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주머니의 왼쪽과 오른쪽의 용량을 비교하다보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온 그림자와의 서먹한 관계가 미안해진다

어떤 날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그리다가

다음 날에는 방바닥에서 뒹구는 이율배반이 바로 그 관계다


그림자를 두고 온 날에는 

서걱거리는 주머니 속에 구겨 넣은 바람을 만지작거리면서

당신이 못 다 간 길이 궁금해서

천국과 지옥 사이로 난 길을 아무렇지 않은 척 걷는다


천국에도 그림자가 있을까 아니면 지옥에서는 그림자도 불에 탈까

생각이 생각을 먹어치우는 동안에는 

그림자대신 누워 참회의 목록을 훑는다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은 주머니 속에서 그림자를 꺼내는 것

놓고 온 그림자가 선한 것인지 주머니 속 그림자가 선한 것인지를 모르면서

넣었다 뺐다 하며 그림자와 내 상관성을 추산하고

푸른곰팡이가 자라는 길섶에 서서

서걱거리는 속을 꺼내 되새김질로 다독거린다


그럴 때마다 내 그림자의 목젖이 청량해지고 

한걸음 떼는 것이 버겁던 어제와는 달리 한결 가벼워졌으므로

주머니 속이 서걱거려도 

하루를 접는 일이 그리 서운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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