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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희 Oct 06. 2023

외상장부

#2023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3

인천행 전철이 막 숨을 놓기 전에 지나는

역이 한 시절의 풍미를 다 실어 보내느라 덜컹거리고

사람 몇이 골목을 빠져나오면 하루가 접히는 곳

가게 한쪽에 덧대 걸었던 하얀 발을 거두는 이가 있다


미닫이문 얇은 유리에 사철 김이 서려 있는 안쪽

민무늬 두건을 쓴 청년이 겉절이를 무치고

종점 같은 절벽에 선 이들이

나란히 앉아 지난했던 시간들을 감아 넘긴다

한때는 이 동네를 쥐락펴락했을 지도 모를 노인이 

명줄 길어질 거라며 너스레를 떨고

막걸리 냄새 풀풀 풍기는 중년남자는 

무슨 화가 났는지 벌컥벌컥 국물을 들이 마신다 

삶의 종착역 부근에 선 듯 보이는

그들은 통하지 않는 말을 테이블 구석에 밀어두고

막차가 그러하듯 숨을 몰아쉬고는 

멸치국물 바닥난 대접을 내려놓는다 


한 그릇 더 드려요?

청년의 손엔 면발 수북한 그릇이 벌써 들려 있고

푹푹 끓던 육수 솥이 막차 지난 후처럼 가라앉는다


국수 가락처럼 술술 빠져나가 종점을 향하는 세월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으며

바지 주머니를 더듬는 꺼칠한 왼손

방금 무친 겉절이 한 봉지가 오른손에 들려있고

청년은 

명단 없는 외상장부에 오천 원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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