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2
담쟁이 떼 지어 기어오르는 탈색된 벽이
구한말 댄스파티 하던 구락부 돌아내려온 바람을 붙들고 있다
청나라 변발처럼 기묘하게 절지당한 나무 한 그루가
콘크리트 바닥에 얼굴을 비춰보고 있는
조계지 초입
적 나간 원조간판을 자랑스레 세워놓은 짜장면 박물관의 밀랍인형처럼
드문드문 깨진 벽이 말을 삼키고 있는
건물은 제 수명을 늘이려 안간힘으로 비둘기를 쫓고
무심한 사람들이
창고 모퉁이를 돌아 패루 안쪽으로 빨려들어 간다
개항기부터 오늘까지 객쩍게 굴러다니는 빛바랜 풍문들을
균열도 훈장이 된 낡은 창고들이 군말 없이 주워 담고 있는 곳
국적 없는 새들만 자유로운, 자유공원 아래
그래도 여기는 한때 북적거리던 개항장이다
가장 무거운 빛깔은 틀림없이 저 벽돌색일 거라고
허구한 날 선수를 빼앗기는 배가 몸무게를 줄이고 있는
인천항 내려다보이는 공원 구석에서
장기판 위를 난행하고 있는 노인들의 딱딱거리는 대거리
구한말에 살지도 않았으면서
‘나 때는 말이야’를 남발하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곳
시답잖은 바람마저 완고한 단색을 고집할 때
담쟁이는
넘지 못할 벽이어도 애써 기어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