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외 추가작-3
(박찬희 제4 시집 <서로의 사이에 있다> 중에서)
고속으로 질주하는 차창 안에서 그녀는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른다 오른 손과 왼 손의 손가락들이 피아노를 친다
빨강 조끼를 입은 화가가 이젤에 올려놓은 캔버스에서는 나무가 흔들린다 그 옆 시내 위로 두루미 한 마리가 추락과 비상을 반복한다
한동안 걸어 오른 언덕 위의 카페는 아직 초저녁에 불을 켜놓았다 낡은 축음기에서 레코드판이 돌고 귀에 와 닿는 커피의 맛은 푸르고 밝고 느리고 얇다
새끼 고양이 네 마리가 평상 아래서 나를 지켜본다 눈에 든 가시들이 오밀조밀한 고양이의 얼굴에서 빛난다
보이는 것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동공에 새겨졌다가 어느새 사라지고 역광을 받은 카메라의 줌에서 삐그덕 소리가 난다
운동화 끈이 풀리고 맥아더 동상이 불에 타는 동안 사내는 구호를 외친다 공원의 비둘기들이 어느새 사라졌고 남영동 철문이 굳게 잠긴 것이 비둘기를 가둔 까닭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소문을 밟고 높은 창문 밖을 스캔하고 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내는 더 강렬해지기 위해 보폭을 조절한다 보라색이 어둠 속으로 숨어들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흐느끼고 있는 포플러 이파리, 하나씩 떨어져 날리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
그림이 말을 걸어올 때 쯤 보들레르의 죽음이 그림자를 눕히고 꽃을 들고 온 여인이 무덤에 꺾꽂이를 한다 꽃은 그녀의 손톱에 칠해진 색깔들을 지우고 나를 지켜보던 고양이가 캔버스 밖으로 빠져나가면 언덕 위 카페에서는 싱거운 커피 향이 구호가 되어 사라진다 사라진 것들이 압송되어 간 창문 밖으로 보라색 흐느낌이 보들레르를 위로한다 비로소 꽃의 문이 열리고 아무도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