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끝자락, 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자작나무 숲.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길 위로 나는 첫 번째 발자국을 꾹꾹 눌러 새기며 숲의 깊은 곳을 향해 오르고 있다. 달빛조차 희미하게 닿는 한겨울의 어두컴컴한 설산. 휴대전화 손전등의 가느다란 빛줄기에 의지한 채, 나는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 걸까. 아니, 어디로 가려 하는 것일까. 기억은 눈발처럼 흩어져 잘 떠오르지 않기에,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하나 있다. 우리는 약속을 했다. 언젠가 눈이 오는 추운 겨울날, 결심이 선 그날이 온다면. 저 멀리 깊은 숲속, 생명의 흔적이 희미해져 가는 그곳에서 만나자고. 왜 하필 눈이 오는 날이었을까. 돌이켜보면 나에게 중요한 일들은 모두 눈이 오는 날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 일이 어찌 되었든 나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를 위해 지금 이렇게 산을 오르고 있지 않은가. 결코 목적 없이 헤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산을 올라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하지만 그곳에 닿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걸까. 나는 대답 없는 의문을 삼키며, 칠흑보다 차갑고 얼음보다 어두운 새벽의 설산을 걷고 또 걸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발걸음 세는 것을 잊어버릴 무렵, 나무들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새하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공으로 파고드는 그 빛을 느끼며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고지가 눈앞이다. 약속의 장소가 저만치 와 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일말의 희망에 굳은 의지를 다지고,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몸을 이끌어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걷기는커녕, 나는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속도가 붙으며 시야 사이로 자작나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오로지 그 빛만을 바라보고 달렸다. 팔과 다리는 이미 얼음장같이 차가워져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동상 때문인지 전신에서 기이한 가려움이 느껴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죽어가는 감각이 현실로 떠오를 것만 같았기에.
그렇게 시간이 또 얼마나 흘렀을까. 내가 무엇을 위해 산을 오르고 있었는지조차 희미해지며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드디어 숲이 끝났다.
도착했다. 바삐 놀리던 두 다리를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 경이로운 설경이 펼쳐졌다. 나는 설국(雪國)의 앞에 서 있었다.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시야의 검은 수평선이 울렁거렸고, 그 앞으로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대지와 한낮 같은 백야(白夜)가 펼쳐져 있었다. 차가운 햇볕 아래 잠시 숨을 고른 나는 다시 발걸음을 떼어 얼음 위를 걷기 시작했다. 딱딱한 눈과 부드러운 얼음의 감촉이 발끝에 미세하게 전해졌지만, 다리의 감각은 이미 사라져 가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이제는 정신을 차리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천벌처럼 무거웠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였는지 잊지 않기 위해 발을 내디딜 때마다 필사적으로 나를 떠올렸다.
방금 왼발을 디뎠던가, 오른발을 디뎠던가. 걷는 법조차 잊어버릴 무렵, 저만치 멀리 수평선 앞에서 작은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두 개의 반점이었다. 수평선 위에 있던 반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꿈틀거리며 제 형체를 찾아갔다. 그것은 볼수록 사람의 형상과 같아 보였다. 얼마의 시간이 더 흐르자 그것은 완전히 사람의 실루엣을 갖추어 태양처럼 수평선에서 타오르고 있었고, 나는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표현하자면 우리였다. 또 다른 말로는, ■■■과 ○○○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이것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랑과 연민, 기쁨 또는 슬픔? 아니,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기에 정의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보다 우리가 약속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 그 반가움에 엉켜 붙은 뜨거운 눈물이 얼어붙은 뺨을 녹이며 흘러내렸다. 나는 오늘, 그리고 지금까지 헛된 걸음을 한 것이 아니었다. 틀림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나의 가냘픈 다리가 형체를 잃어 부서지기 시작했고, 불덩이같이 뜨겁던 팔이 녹아내릴 무렵, 마침내 우리는 서로의 한 뼘 거리에 닿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떤 대화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채로 영원 같은 정적이 흘렀다. 나의 몸은 부서지고 녹아내리며, 다시 얼어붙어 갔다. 척추가 뒤틀리고 온몸이 경련을 일으킬 때, 형체를 잃어가는 나의 몸뚱이 위로 ■■■과 ○○○이 다가와 나를 감싸 안았다. 얼음보다 차갑지만 태양보다 따뜻한 그 포옹 아래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가 되어 영원한 겨울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