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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소 Aug 27. 2021

다시 보아야 보이는 것들

다시 보아야 보이는 것들

가을에 찾은 화담숲

지인이 선물처럼 화담숲에 데려가 준 적이 있다. 풍광이 아름답다는 소문에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처음 가보았던 가을의 화담숲은 다채로운 색색의 단풍이 절경을 이루어 마치 꽃밭과도 같았다. 그 화담숲을 다음 해 여름 다시 찾았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가을에 왔었던지라 여름의 화담숲을 다시 찾게 되었을 때는 큰 기대가 없었다. 그저 숲이나 걸으며 산책하자는 마음에 나섰던 터였다. 여름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기에 덥지도 않았고 비에 흙이 촉촉이 젖어들어 온통 숲 내음이 가득했다.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은 없었지만, 초록빛의 여름 숲은 싱그럽고 푸르른 다른 멋이 있었다. 외려 눈길을 끌던 화려한 자태가 없으니 그때는 스쳐 지나갔던 나무며 풀, 꽃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들에 존재감이 생겼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단풍철에 바라보았던 숲은 마치 아름다운 여인에게 홀려 다른 것은 눈에 그다지 들어오지 않는 남정네의 마음이었던가 싶었다. 분명 그때도 자리하고 있었을 것인데 그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너무 많았다. 아마 계절에 따른 식생이 달라진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하나둘씩 보지 못하였던 것들을 찾아보고 발견해가는 것이 재미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화담숲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을 즐기고 있었다.

과연 여름철 청초한 숲의 색이 바탕이 되어 또 다른 것들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녹색과 확연히 대비되는 하얀 자작나무 숲도 그러했고 과실 수 여기저기 붉어져 가는 열매들도 덕분에 눈에 띄었다.     


이렇게 식물이 좋아지면 나이 든 거라는데 내 나이가 그리되었나 싶었다. 여리여리 작은 풀도 귀엽고 길가에 핀 들꽃도 예쁘기만 하였다. 신기해하며 나무 공부, 풀 공부, 꽃 공부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작게 붙어 있는 푯말을 하나하나 살피고 식물에 얽힌 이야기들을 읽었다.

고로쇠 수액으로 유명한 고로쇠나무는 뼈에 이롭다는 한자어 골리수(骨利樹)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로쇠가 주는 어감이 순우리말처럼 느껴졌는데 깜빡 속았다. 뼈에 좋다니 약재로도 쓰이겠다.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낙상홍은 서리가 내릴 때 열매가 붉어진다고 하여 붙은 이름으로 우리에게는 '사랑의 열매'로 알려져 있다. 연말이 되면 소외계층을 위한 모금 운동을 하는 단체의 ‘사랑의 열매’ 배지를 수없이 보았지만 그 열매가 무엇인지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물박달나무는 딱딱해서 고집이 센 이에게는 '삼 년 묵은 물박달나무 같다'라고 한단다. 어디서 고집 센 사람을 만나면 그 말을 써먹어 봐야겠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고집이 세다는 최 씨인데 누군가에는 물박달나무 같은 사람이 아닌지는 모르겠다.

 자작나무는 나무가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단다. 희고도 쭉 뻗은 자태가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빨간 머리 소녀 앤이 친구 다이애나와 소풍을 다녔을 것 같은 곳이었다. 하얀 나무껍질 때문인지 한여름의 숲에서 맑고 청아한 분위기를 담당하고 있었다.

 


전에는 눈에도 들지 않았던 식물 중의 하나가 양치식물이다. 누구도 머무르지도 않고 눈여겨보지 않는 식물이다. 그런데 오늘은 양치식물에도 눈길을 주었다. 공룡 시대부터 버텨온 끈기와 생명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지구에서 긴긴 시간을 지나온 양치식물의 이름은 양의 이빨을 닮아서 ‘양치’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숲을 들여다볼수록 학창 시절의 과학 시간보다 흥미진진해졌다.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나무이다. 이 나무는 서울의 창경궁에서도 만났던 적이 있어 반가웠다. 임금님의 부채인 미선을 닮아 미선나무라 불린단다.

중국단풍의 잎은 꼭 오리발을 닮았다. 작은 오리의 발바닥을 닮은 듯하여 귀여웠다. 이렇게 작은 풀과 들꽃의 이름을 지나칠 적마다 넌지시 불러보니 그 단어가 입가에 기분 좋은 울림을 내었다. 작고 소소하지만, 그 존재를 알아준다는 것은 얼마나 의미 있고 좋은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숲길을 걸으며 약재로 쓰이거나 특이한 식물들을 많이 만났다. 옛날 사람들은 어찌 이 풀과 나무들의 특성, 효능을 다 알았을까 싶다. 먹을 것이 없어서 나무껍질도 먹어보고 태울 것이 없어 이나무 저 나무 태워도 보고 아프면 이것저것 먹어보는 등 효능을 시험해보다 우연히 알게 된 것일까. 독이 들어있는 버섯을 먹고 누군가 죽게 되면 위험한 독버섯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직접 먹어보고 발라보는 등 체험해 낸 것들이 현대에까지 구전으로 또는 문헌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유산이 된 것이니 지혜로운 조상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내려오는 길에는 분재 전시가 있었다. 나는 분재라는 것은 보기에는 좋지만 인위적으로 작은 화분에 더 클 수 있는 나무를 가두어 둔 것만 같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중 눈길을 끄는 분재가 있었다. 살아있는 줄기와 죽은 줄기가 공존하는 우아한 멋이 있는 어떤 문인목(선비나무)이었다. 이 문인목은 삶과 죽음에 관한 생각에 잠시 발길을 머무르게 했다. 삶과 죽음이 다르고도 같아 마치 하나처럼 엉켜 있었다. 우리 인생도 이처럼 삶과 죽음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도 화담숲에서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기에 보고 또 보았다. 장소가 달라서인지 흔히 볼 수 있는 무궁화조차도 동네에서 보던 느낌과 달라지니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주위 환경이나 배경에 따라 이렇게 귀하게 여겨질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깊어가는 여름 끝자락의 숲 여행은 지친 몸과 마음에 치유하는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같은 곳을 각기 다른 계절에 오게 되니 그에 따라 달라져 가는 숲의 모습을 구석구석 보게 되어 무엇보다 좋았다.

 예쁘고 화려한 것들이 좋았던 날들이 지나니 꾸미지 않고 소박한 것들이 점점 좋아진다. 예전의 모습을 간직한 것들이 어여쁘고 손때 묻고 정겨운 것들이 새것보다 귀하게 여겨진다. 물건도 오래 두고 보면 정이 드는데 사람도 오래 벗하며 사귄 사람들이 편하고 좋다.

다시금 보니 눈에 띄지 않아 지나쳤던 것들이 보이고 다시 가니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다. 지나간 세월도 돌이켜보면 아쉽기만 하고 다시금 그 나이를 산다면 그리하지 않고 더 잘살아볼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것들도 많다.

모르고 지나치고 내게 의미 없게 생각되었던 것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는지를 돌아보았다. 멀리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가까이에 있지만 잊힌 것들을 더 아끼고 한 번 더 돌보고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 하겠다. 그러니 새로운 것만을 찾지 않고 정들고 오래된 주변을 가만히 들여다보아야겠다. 그리고 그 존재를 알아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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