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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연 Oct 19. 2021

채워지지 않는 여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얇은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집을 나섰더랬다. 그날은 수업이 두 개 있었고 5시쯤엔 H언니를 만나 맥주를 마시려 했다. 첫 번째 수업을 마치고 오들오들 떨며 근처에 있는 원더플레이스에 들어갔다. 나는 추울 때마다 옷을 사 입는 낭비를 하고야 만다. 일본에서 돌아와 술을 마시던 밤에는 스파오에서 아주 얇은 검은색 패딩 조끼를 샀고 계산대에 서 있는 나를 목격한 친구들과 눈이 마주쳐 웃음을 터뜨리며 2차를 갔던 기억이 난다.


  난 항상 그렇게 충동적으로 살아간다. MBTI 맨 뒷자리가 P인 인간답게 아무런 계획도 짜지 않는다. 그저 가슴속이 생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가끔 그 불덩어리 같은 열정마저 확 꺼질 때가 있긴 한데 보통 지갑 속 돈을 다 비우고 히키코모리가 됐을 때 그렇다.


  원더플레이스에서 스웨트 셔츠를 한 장 골라 결제하고 피팅룸에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멋진 사진도 - 아니, 사실은 후줄근한 - 몇 장 남겼다. 머리 위에 눌러쓴 휠라 모자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른 모자들은 다 엄마에게 선심 쓰듯 줘버렸거나 어딘가에서 잃어버렸으니까. (대부분 집에서 잃어버렸다. 울 엄마가 훔친 걸지도 모른다)


  두 번째 수업을 마칠 때만 해도 무거웠던 몸이 H언니와 만나기로 한 이자카야에 들어가자마자 가벼워졌다. 그 가게에는 에비스 신이라도 사는 걸까? 그가 든 낚싯대에 내 목덜미가 콱 걸렸는지도 모르지. 여하튼 첫 잔은 무조건 맥주다. 그게 이자카야의 국룰이기 때문이다. 잔을 다 비워갈 때쯤 H언니가 도착했다. 나이스 타이밍이라며 우리는 사와를 주문했다.


  그다음엔 남자 이야기를 잔뜩 했다. 오늘 브런치에서 남자 이야기만 하는 친구가 싫다는 사람의 글을 읽었는데, 나는 누군가의 재테크 이야기보다 남자 이야기가 천 배는 좋다. 주위 사람들이 누구를 만나는지 누구랑 헤어지고 또 새로운 누구와 잤는지 지금 결혼은 하고 싶어 하는지, 그런 것들이 내 최대 관심사다. 꼭 주변 사람일 필요도 없다. 요즘 핫한 배우가 누구인지 새로 데뷔한 아이돌 중에선 누가 잘생겼는지 그런 이야기들도 충분히 흥미롭다. 그냥 난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무엇으로 채워가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내가 영화 <해피투게더>을 본 이후로, 우리는 그 영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H언니는 그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넌 보영이야, 아니면 아휘야?"라고 묻는다고 한다. 나는 헷갈려서 "아휘"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H언니가 난 보영이라고 내가 주인공 이름을 바꿔 말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아, 그래. 누가 봐도 난 보영이었다. 그것도 지금 아휘가 무척이나 필요한 보영.


  H언니에게는 구원자 모티프가 있다. 난 그냥 엉망진창 인간이다. 우리가 남녀로 만났다면 언니와 나는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언니가 날 방에 가두고 담배를 사다 주면 난 그 담배를 다 주먹으로 쳐서 망가뜨려버리는 역할이다. 나는 허공에 주먹질하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문득 보영은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요즘 난 나도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거라는 체념을 자주 한다.


  집에 돌아갔는데 친구 Y에게 연락이 와있었다. 그녀에게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내가 왜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고 느끼는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요즘의 상처에 대해 말했다. 그녀는 내가 알게 모르게 많은 상처를 받고 있는 거라고 했다. 그러고나서 하나님이 그녀를 구원해준 호러 코미디 장르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나만 시트콤 같은 인생을 사는 건 아닌가 보다.


  어제는 잠들기 전에 <유령신부>를 봤다. 조금 더럽고 재미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상상력과 그 감각이 부러웠다. 가볍게 볼만한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는 그 시체들 이야기가 뭐라고 펑펑 울고 있었다. 유령신부가 나비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내가 추구하는 사랑의 방식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 심장이 마치 죽은 사람의 것처럼 멈춰버렸다고 이제는 다시 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 심장은 멈춘 게 아니라 이제야 부서지기 시작한 거구나.


  다시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고 외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세계에 속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잡아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구속을 견딜 수 있을까. 왜 죽었는데 눈물은 나는 걸까. 유령신부의 대사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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