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로써

by 시소

대학 때 같은 학회 선배가 자신의 가정사를 이야기한 적이 있어.

누군가에겐 털어놓고 싶어 용기를 냈을 텐데 나는 그저 부담스러웠지.

지금의 나라면 따뜻하게 한번 꼭 안아주고 위로해 주었을 텐데 그때의 난 그러지 못했어.

비슷한 상처가 있었으니까.

내 안 좋은 기억들까지 끄집어내지는 것 같았거든.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어.

그런 이야기 좀 그만하라며 화를 내고 말았지. 선배에겐 좀 미안한 일이야.


엄마, 나는 가끔 커다란 풍선이 몸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아.

커질 대로 커진 풍선이 내장 여기저기를 누르는 것처럼 답답해지는 순간이 있어.

가만히 있으면 펑하고 터져버릴 것 같아서 심호흡을 크게 하며 가라앉히곤 해.

그래도 안되면 책을 보고, 그래도 안되면 미친 듯이 뭐라도 써. 내 오랜 습관이야.

뭔가를 쓰는 행위가 나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돼.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이런 장면이 나와.

술을 잔뜩 마시고 돌아온 정희라는 인물이 속옷을 빨기 시작해. 그리곤 말하지.

“그날 입은 걸 빨면 난 아직 괜찮은 겁니다. 씻었고, 속옷도 빨았습니다. 나는 오늘 일과를 다 했습니다. 나는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난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여느 날 같지 않은 날 여느 날과 같은 행동으로 자신을 안심시키는 거야.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내가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해.

뭔가를 쓰고 있을 만큼 지금 괜찮은 거다 스스로가 믿게 되길 바라면서.


엄마, 나에게 그게 왜 하필 글이었는지 알아?

선배처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내게도 있었으니까.

그 이야기들을 다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글로 쓴 거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건 쉽지 않아.

정신과 의사들처럼 돈을 받고 일로서 시간을 내어주는 게 아니라면

부정적인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지치게 만들어.


그래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기보다 일기를 썼어.

글로 적어놓으면 내 생각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으니까.

분명 참을 수없이 요동치던 마음이었는데 종이에 적어놓고 나면 참 별거 아니게 느껴져.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이렇게 몇 줄의 글에 불과하다니.

글로 적히는 순간 그 마음들이 나를 떠나 종이에 봉인되는 것 같기도 해.

내 안에 터져버릴 것 같은 풍선의 바람을 글로써 조금씩 빼내는 거지.

그러면 숨이 좀 쉬어져.


엄마 그런데 내겐 남은 일기장이 없어.

자신의 일기장을 모아놓는 사람을 본 적이 있지만 난 그러지 못했어.

연말이 되어 새 일기장을 살 때가 오면 그 전의 일기장은 잘게 찢어 버리지.

폐지를 수거하러 오는 사람이 신경 쓰여 재활용통에도 넣지 않아.

보안 문서를 파쇄기에 넣어버리듯 손으로 찢어 쓰레기봉투에 버리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애초에 일기를 쓸 수가 없거든.

그건 정말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던 마음들이니까. 독자를 고려한 글쓰기는 아닌 게 분명해.



우울증이 심했던 시기에도 일기 쓰기가 도움이 됐어.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다가도 문득 집에 있는 일기장 생각이 났거든.

죽더라도 그것부터 없애고 죽어야 하는데 싶었으니까.

엄마, 그런데 요즘 들어 그 일기장들이 다시 생각나.

딴에는 정말 솔직하게 썼던 것이었지만 정말 솔직한 게 맞았을까?

그때의 나는 일기장에 나를 온전히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

어쩐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내가 나 자신에게는 온전히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이 글은 필요하지 않았을 거야.

아직 나에겐 정리되어야 할 마음들이 남아있으니까.


이 글을 쓰는 지금 엄마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져.

이렇게 글로 내 안의 엄마가 정리되어지는 게.

실제로도 작아질 대로 작아진 엄마가 내 안에서도 점점 작아지는 게.


엄마, 내가 모르는 엄마가 꼭 존재하기를 바랄게.

내가 기억하고 정리해 나가려는 엄마는 현실을 늘 지옥처럼 살던 모습이지만

내가 모르는 행복을 가진 사람이기를.

내가 모르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기를.

나는 모르지만 엄마가 아는 아는 엄마는 사실 삶이 조금 살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이건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한 한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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