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을 빌어

by 시소

초등학생일 때 나는 꽤 공부를 잘하던 편이었어. 그러면 엄마가 좀 즐거워할까 싶어서.

삶이 힘들다는 엄마를 웃게 해주고 싶었거든.

밭일을 하고 있는 엄마에게 시험성적을 이야기하면 엄마는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었지.

엄마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좋았어. 엄마의 기분이 그리 오래가진 못했지만.


아이를 키우며 읽었던 책 중에 여성학자 박혜란 씨의 책들이 있어.

가수 이적의 어머니로도 알려진 분이야.

그녀는 한 TV프로에서 공부에 관해 아들과 나눈 대화를 소개

”엄마. 나 공부 잘하면 뭐 해줄 거야?”라는 아들의 물음에

”공부 잘하면 네가 좋은 거지 내가 좋아?”라고 답했다고 했지.

나는 그러지 못했어. 학창 시절 공부를 했던 이유, 대학을 가고자 했던 이유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거든.

엄마는 늘 자식이 아니면 살 이유가 없다고 말하곤 했으니까.


내 눈에 비친 엄마는 그저 ‘견디는 인생’이었어.

나는 엄마가 잘 견딜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엄마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딸이었지.

“내가 크면 집 지어 줄게. 돈 벌어 줄게. 그러니까 그때까지 참아.”

엄마에게 살아가는 이유를 만들어 주고 싶었어.

그래서 성적이 오르거나 상을 타는 일이 생기면

스스로 그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엄마에게 소식을 전할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지.

대학에 수시로 합격하던 날도 마찬가지야.

나를 축하해 주는 친구들 사이를 뛰쳐나와 공중전화를 향해 뛰었어.

지금 가장 먼저 축하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엄마, 지금의 나는 슬픔을 나누지 않는 관계보다 기쁨을 나누지 않는 관계가 더 멀다고 생각해.

그 사람이 나로 인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상대에 대한 배려지만

그 사람이 나로 인해 기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상대와의 단절에 가까우니까.

그래서 좋은 일이 생겨도 그걸 엄마와 공유하지 않게 되던 날

엄마와 정말 멀어졌구나 생각하게 됐어.

엄마가 기뻐할 이야기인걸 아는데 더 이상 내가 어떠한 이유도 되어주고 싶지 않았거든.


엄마는 자신의 지난 인생이 마치 나의 성공을 위한 것이었음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듯했어.

하지만 결국 자신을 위한 증명이었지.

나를 위한 것이었다고 하기엔 내가 받는 상처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엄마가 연민했던 것은 나로 인해 충분히 증명되지 못한 자신의 인생이었다고 생각해.


엄마, 밖에서 아이를 마주치면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나풀나풀 뛰어 내게로 와.

그 모습을 보다 생각해.

‘너는 커서 효도 따위 하지 않아도 좋아. 그 이상의 것들을 지금 이렇게 넘치게 주고 있으니까.’

아이들은 내가 엄마라는 이유로 무한한 사랑을 줘.

엄마도 나에게 한땐 그런 존재였지. 엄마가 힘들어하면 나의 세상도 무너졌어.

엄마는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어. 나는 자고 있는 엄마 옆에 누워 가만히 손을 대고 기도했었지.

‘엄마 몸속에 병균이 있으면 이 손을 타고 저에게로 다 오게 해 주세요.’

엄마가 아픈 것은 나에게 커다란 두려움이었거든. 엄마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그만큼 사랑하던 엄마였어.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던가에 대한 기억으로 지금의 내 아이들도 그럴 걸 알아.


내가 살던 세계는 수시로 흔들리고 부서져 내렸어.

그 세계를 내가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시간들이 있었지만 엄마는 쉽게 바뀌지 않았지.


나는 아이들의 세계가 단단하고 안정적이며 평화롭기를 바라고 있어.

그리고 아이들이 나를 위해 어떠한 기도도 하지 않았으면 해.

그래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내가 엄마의 세계에 살지 않는 거야.

그리고 엄마와는 다른 엄마가 되는 것.


안녕 엄마.

헤어짐의 의미를 담아서 안녕.

그건 엄마와의 물리적 헤어짐이라기보다 엄마로부터 전해져 온 내 부정적인 무의식과의 안녕이야.

나는 방심하면 언제라도 불쑥불쑥 솟아나는 생각들과 평생 싸워야 할지도 몰라.

그래도 잘 해낼 거야. 엄마가 되기로 한 순간부터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

난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거야.

그중엔 엄마도 포함돼. 엄마에게도 감사할게.

내가 아이들을 위해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 알게 된 것은 한때 나의 세계였던 엄마 때문이었으니까.


안녕 엄마.

엄마가 정말 안녕하길 빌어.

건강을 되찾아서 조금 이기적이다 싶을 만큼 엄마를 위해 살아가면 좋겠어.


안녕 엄마.

그래도 엄마로 사느라 애썼던 엄마.

나는 유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거야.

아이들이 엄마를 떠올리면 눈물보다는 웃음이 지어지게.

그러니 엄마도 이기적이다 욕했던 나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더 보란 듯이 안녕하길.

나를 얼마든지 원망해도 좋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애썼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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