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가을 하루
“우리가 흔히 한 겨울이나 한 여름이란 단어는 쓰지만 한 가을이라는 말은 잘 안 쓰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가을이 깊어진 기분이 들어 지금이 바로 한 가을이 아닐까 싶습니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주옥같은 멘트를 듣고 있으니 반복되는 평일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다. 한 가을이라는 말이 그날 아침과 잘 어울려 노트에 옮겨 적는다.
일요일 아침 알람 소리 없이 잠에서 깼다. 아홉 시 반, 냉기가 느껴지던 가을 아침이다.
주말 아침이면 나는 내방 책장 앞에서 느긋하게 라디오 듣는 것을 기대한다. ‘기분 좋은 아침 김창완입니다’가 나온다. 방 안에서 김창완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린다.
삼십 분 남짓 라디오를 듣다 보니 시간은 열 시. 배가 고프다. 얼른 무어라도 만들어와야 라디오 사연을 들으며 밥을 먹을 수 있다. 곧바로 주방으로 갔다. 가족들이 아침으로 김치볶음을 먹었는지 아직은 온기가 남아 있는 주방 냄새를 맡으니 불쑥 김치부침개가 떠오른다. 싱크대 구석에서 곰표 밀가루를 꺼낸다. 냉장고를 여니 야채 칸에는 호박, 가지, 고추가 있다. 모두 할머니가 밭에서 따온 야채들이다. 커다란 그릇에 밀가루를 붓고 김치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김장김치를 잘라 넣는다. 김칫 국물도 충분히 부었다. 밭에서 나온 야채를 다져 넣고 계란 두 알을 깨 넣는다. 물을 자작하게 넣고 국자로 휘휘 저으니 엄마가 만들던 모양새다. 기름 부어 달궈진 프라이팬에 한 국자 떠 넣으니 지글지글 거리며 전 냄새가 올라온다.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에 기름 냄새가 뒤섞이니 둘의 조합이 좋다.
주방에서 김치부침개를 만들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온다. 라디오가 있는 내 방 책장 앞에 앉으니 벌써 열 시 반이다. 아침을 먹으며 들으려고 했던 청취자 사연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다. 하는 수 없이 광고를 들으며 부침개를 먹다 보니 금세 열한 시다. 김창완의 목소리는 이내 사라졌다.
창문 밖 강아지 깜순이는 밖에 나가자고 문을 긁고 낑낑거린다. 그 아우성에 나는 옷을 갈아입고 산책을 나간다. 산 아래 벼 밴 냄새가 좋아 그 앞에 서있는데 깜순이는 나를 보고 엉덩이를 치켜세우더니 꼬리를 힘차게 휘젓는다. 돌멩이를 던져주니 볏짚 사이로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는 모습이 귀엽다. 결국 산책은 연신 돌멩이만 던지다 끝이 났다.
열두 시쯤 집에 돌아와 대문을 여니 할머니가 나갈 채비를 마치고 서 계신다. 나는 장에 간다는 할머니를 따라가기로 한다. 할머니를 쫓아 장터로 가니 저번 주보다 시끌벅적하다. 할머니는 장에서 자신의 바지 두벌, 알타리 무, 새우젓을 샀다. 나는 할머니에게 천 원짜리 핫바를 사달라고 한다. 장에 따라가면 핫바 먹을 생각에 들뜨던 어릴 적이 생각이 나서이다. 할머니는 알록달록한 동전지갑 속에서 쌈짓돈을 꺼낸다.
“무얼 먹고 싶은디?”
할머니의 표정은 손녀에게 무엇이라도 다 사줄 작정인 듯 보인다. 나는 어묵집을 가리키며 ‘핫바’라고 말한다. 할머니는 내 뒤를 따르며 꼴랑 어묵 그걸 뭘 그렇게 먹고 싶냐 하신다. 나는 떡 핫바를 주문한다. 할머니는 어묵집 옆에서 상인들과 이야기를 하고 나는 할머니의 짐을 든 채 핫바를 받아먹는다. 오랜만에 둘이 장에 가니 할머니 옆에 있는 나는 정말로 어린아이 같아 보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리가 아프신 할머니 덕에 우리는 편의점 앞에서 쉬었다 가기로 한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는 찰나, 마침 오늘 만나기로 한 친구가 차에서 내려 나를 부른다. 덕분에 할머니와 나는 차를 얻어 타고 편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두시 반이다. 점심시간은 훌쩍 지났지만 친구와 나는 미뤄두던 점심 약속을 지키러 사암리로 간다. 사암리는 밥 먹고 커피를 마시며 호수 한 바퀴를 걷기 좋은 동네다.
사암리 호수 앞 둥둥 커피는 교회 언니가 일하는 곳이다. 우리는 그 카페에 들러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먹었다. 오늘 우리는 셋이서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다. 퇴근할 언니를 기다리며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서로에게 요즘 어떤 것에 집중하며 지내고 있는지 물어본다. 나는 글쓰기에 관심을 두고 지내고 있다고 말했고, 친구는 새로 들어간 직장에서 처음 경험해본 일들을 나에게 이야기를 해준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시니 곧 세시가 되고 언니가 퇴근했다. 우리 셋은 몇 달 전부터 가고 싶어 했던 ‘샤갈의눈 내리는마을’에 돈가스를 먹으러 걸어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냥 돈가스와 치즈 돈가스, 마르게리따 피자, 샐러드를 시킨다.
날이 쌀쌀했지만 테라스에 자리를 잡는다. 옆에 서있던 이제 막 노래지던 은행나무가 예뻐 보여서이다.
곧 따끈한 오뚜기 수프가 나온다. 한 숟갈 떠먹으니 예전 그 맛이다. 어렸을 때 엄마에게 레스토랑에 가자고 졸라서 먹던 그 수프맛이 난다. 속 안이 좀 따듯해지는가 싶더니 돈가스와 피자가 나온다. 갓 튀긴 돈가스를 보니 마음이 급해 칼부터 집어 든다. 겉이 바삭한 돈가스를 자르니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치즈에서는 김이 피어오른다. 돈가스를 집어 입에 넣으니 생각보다 뜨겁다. 호호 거리며 입안에 있는 돈가스를 식힌다. 양념이 베인 돈가스를 입에 한가득 오물오물 씹으니 눈에서는 하얀 쌀밥이 들어온다. 포크로 쌀밥을 집어 입에 넣었다. 돈가스의 양념이 하얀 쌀밥에 스며든다. 돈가스는 밥이랑 먹어야 제 맛이다. 야채가 싱싱한 샐러드도 맛있다. 가게 주인은 피자 위에 올라간 방울토마토를 직접 기른다고 했다. 나는 이 집 음식이 제법 빠르게 나오고 돈가스 옆에 김치와 밥을 주는 ‘코리안’ 돈가스집이라 좋았다.
식사를 마치니 네시 반이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어 전에 가보고 싶었던 ‘시골책방생각을담는집’에 가기로 한다. 책을 둘러보다가 예전에 몇 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 ‘아무튼,서재’가 보인다. 친구를 주는 바람에 끝까지 읽지 못했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읽어보고 싶어 구매한다. 주문한 뜨거운 커피를 가지고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다. 이 집은 책을 살 때 책방 이름이 새겨진 검정 연필을 준다. 나는 그 연필로 책에 줄을 그었다. 고요하고 커다란 책방에서 밑줄 긋는 소리가 잘 어울렸다.
해가 저문 다섯 시 반쯤 집으로 간다. 엄마는 나를 보자 뜨끈한 보일러에 답답했는지 맥주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김치냉장고 속에서 가장 시원한 맥주를 집어와 엄마에게 건네주며 그 책방에 대해 말한다. 시를 좋아하는 엄마는 내 말에 관심을 가진다.
“엄마 시 좋아하지 않아? 난 시가 어렵던데”
“시는 의미가 주는 여운이 좋아.”
엄마는 뼈속까지 차가워지는 맥주 한 모금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시에 대해서는 아주 근사하게 말한다. 언젠가는 책방 한편에 시집이 있는 그곳에서 엄마와 함께 책 산책을 하고 싶다.
씻으니 오후 여섯 시 반이다. 나는 그곳에 대해 기록한다.
“‘출판기념회’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야외에 걸려있었다. 이 시골에서 책방도 신기한데 출판기념회를 연다니 낭만이다. 커다란 책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조용하고 따듯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잔잔한 음악이 천장 높은 공간과 잘 어울렸다. 이 많은 책을 다 읽었느냐고 묻는 질문에는 그럴 리가요라는 말로 잘 대답하는 주인장이었다. 책을 읽을 때는 주인장의 타자 치는 소리가 듣기에 좋았다.”
네이버에 어플을 켠다. 주인장이 알려준 생각을 담는 집 블로그를 찾는다. 그리고 그 블로그를 두 시간 정도 꼼꼼히 본다. 흥미로운 프로그램들이 많은 걸 보니 서울 곳곳에 있는 독립서점과 비슷한 분위기가 난다.
그러다 밤 아홉 시가 되어서는 출출하다는 아빠의 주문에 잠시 맥주 심부름을 다녀오기도 한다. 블로그에서 본 재미있는 프로그램에 신청할 생각을 하니 맥주를 사면서도 마음은 콩 밭에 있다. 집에 돌아와 이불속에서 ‘건축 탐구-집’이라고 검색한다. 책방에 다녀오니 전에 봐 둔 원삼면의 한 집이 생각나서이다. ‘출퇴근이 없는 집’이라는 제목의 15분짜리 동영상을 클릭한다. 영상의 한 장면 중 시골에 모여 논어를 공부하는 동네 주민들의 모습에 불현듯 용기가 난다. 이 시골에서도 문학 활동을 할 수 있겠다는 용기이다. 나는 좀 전에 관심 있게 보아둔 ‘에세이 창작반’에 들기로 마음먹는다. 있는 거라곤 논과 밭, 물류센터와 창고뿐인 이 시골에서 책상에 둘러 모여 글을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상상했다. 시골 구석에 모여 같이 글을 쓴다는 일은 꼭 영화 같았다.
작정한 김에 좀 전에 블로그에서 보아둔 에세이 창작반에 신청하겠다는 문자를 넣어둔다. 책상 앞에 앉아 필통을 찾는다. 초등학교에 처음 가던 날 있는 힘껏 뾰족하게 연필을 깎아 가지런히 내려놓던 어릴 적 모습이 생각난다. 필기도구를 챙기며 느껴지던 그 설렘이 오랜만이다.
늦은 밤 열 시, 창작반 신청 문자에 답장이 왔다. 주인장은 나에게 과제까지 알려주었다.
‘어느 날 하루 일과 나열하기’
잠들기 전 노트를 펼쳐 오늘을 기록한다.
한 가을, 하루에 책과 산책이 있던 오늘이야말로 이상적인 하루이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