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by 시선

워크샵 날이었다. 리조트에 짐을 풀고 사람들을 따라 스키장으로 갔다. 처음 가본 탓에 나는 모든 것이 생소했다. 동료들을 따라 스노보드 장비를 렌탈했다. 동료들이 하는 대로 스키복을 빌려 갈아입고 리프트권도 끊었다. 초급자 코스 앞에 섰다. 경사가 완만한 걸 보니 당장이라도 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때 롤러브레이드와 스케이트보드를 곧 잘 타던 나는 옆에 있는 남자 동료들에게 그런것들과 비슷한 거 아니냐고 물었다. 남자 동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스케이트보드요? 그거랑은 좀 다른데요.”

“어떻게 다른지 말로 다 설명 못 해요. 체득하는 수밖에요.”

출발 전 한 남자 동료가 나에게 보드 타는 방법을 간단히 설명했다. 나는 경사면에 서서 그가 가르쳐 준 대로 오른쪽 발을 앞으로 내밀고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시선은 오른손 끝을 향했고 내리막길로 서서히 몸을 기울였다.

방향 조절도 못 하는 ‘생초짜’인 나는 그대로 슬로프를 직선 질주했다. 스케이트보드 탈 때만 생각하고 중심을 잡을수록 가속도가 붙었다. 멈춰야 하는데 보드에 묶인 발 때문에 멈출 수도 없었다. 멈출 방법이라곤 엉덩방아를 찧어 넘어지거나 누군가와 부딪혀야 하는 일이었다.

“비켜요 비켜!”

스케이트보드 좀 타봤다고 자신만만하던 나는 그야말로 직선 질주를 하다 ‘민폐녀’가 되고 말았다. 여자 친구를 향해 돌진하던 나를 보고 한 남자는 몸을 던져 여자 친구를 보호했다. 나는 그 남자와 퍽, 소리가 나게 부딪혔다.

“아이 씨,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처음 타봐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팠다. 혼자라 창피했다. 그런데 커플의 눈총까지 받으니 약이 올랐다.

‘내가 오늘 이거 타고 만다.’

나는 계속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슬로프 옆 펜스에 머리를 박고 넘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발이 묶인 채 엉덩이를 들어 올리려니 온몸에 드는 힘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꼭 누가 내 뒤에서 끌어당긴 것처럼 일어서는가 싶으면 또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주먹을 쥐고 땅바닥을 내리쳤다. 모자가 땀에 축축이 젖었다. 땀과 모자 털이 엉겨 붙어 이마가 간지러웠다. 가슴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아린 걸 보니 멍이 든 것 같았다. 넘어질 때 접질렸는지 엄지손가락도 아팠다. 너무 아파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눈앞에 리프트가 보였다. 그만두고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보드에서 발을 풀고 소리쳤다.

“과장님 저 여기서 내려갈게요!”

내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잘 내려가던 여자 과장이 멈춰 뒤를 돌아봤다. 그 앞에 내려가던 남자 동료들도 멈춰 섰다. 과장은 나에게 소리쳤다.

“거의 다 왔어! 한 번만 더 타보자!”

사람들이 숨을 헐떡이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보드에 발을 채우고 슬로프 한가운데로 갔다. 동료들이 하나둘 곁으로 다가와 나를 둘러쌌다. 나는 다시 처음처럼 자세를 잡았다. 오른쪽 발을 앞으로 내밀고 양팔을 벌렸다. 다시 경사면으로 몸을 기울였다. 과장이 말했다.

“소희야 중심 더 낮추고 오른쪽 무릎을 천천히 구부려 봐.”

몸을 낮추었다. 속도가 붙자 또다시 엉덩방아를 찧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가 말한 대로 앞으로 내민 오른쪽에 무게를 싣고 무릎을 구부렸다. 몸의 방향이 점점 오른쪽으로 틀어졌다. 방향이 바뀌자 속도가 조금 낮춰졌다. 이번엔 반대로 왼쪽에 무게를 싣고 무릎을 구부렸다. 서서히 방향이 왼쪽으로 틀어졌다. 나는 낙엽처럼 지그재그 미끄러지고 있었다. 나를 둘러싸며 내려오던 동료들이 소리쳤다.

“소희 탄다!”

서너 시간 만이었다. 서서히 몸이 말을 듣기 시작했다. 이젠 내 마음대로 속도를 조절하고 방향을 바꾸며 멈출 수도 있게 되었다. 한 동료가 나를 보고 박수를 쳤다. 꽁꽁 얼어 빨개진 얼굴로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올렸다. 나는 그때 스노보드를 타고나서 처음으로 웃었다.


온몸에 멍이 들도록 넘어지던 그날 나는 스노보드를 타고 엉덩방아를 찧을 때마다 이것이 나 사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슬아슬 넘어지기 일보 직전이던 모습은 모두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오늘 그만둘까, 내일 그만둘까 고민하던 나의 모습 같았고, 펜스에 머리를 박고 넘어지던 모습은 업무를 하는 동안 덤벙거리며 실수하던 나의 모습 같았으며, 과장님. 저 여기서 내려갈게요, 하던 모습은 매사에 포기가 쉽던 나의 모습과 같았다.

숙소에 돌아와 시퍼렇게 든 멍을 확인하는데 좀 씁쓸했다. 몸에 든 멍이 마치 그런 삶에 치인 멍 같았다.

그날 내가 스노보드를 탔던 서너 시간은 하나의 ‘삶’이었다. 이리저리 넘어져 멍이 들기도 하며, 이를 악물고 일어나 다시 달리기도 하는 삶과 같았다. 너무 세게 넘어져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주해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스노보드를 탈 줄 안다. 이리저리 넘어지긴 했지만 이제 중심을 잡을 줄 안다.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힘에 부쳐 포기하고 싶을 땐 스노보드를 탈 때처럼 ‘한 번만 더’ 그렇게 중심을 잡고 살아내기로 했다.


그날 나는 엄지손가락에 금이 갔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팠다고 했던 손가락이었다. 나는 뼈에 금이 간 것도 모른 채 스노보드를 타다 결국 3개월 동안 깁스 신세를 지게 됐다.

깁스를 한 뒤로도 나의 하루는 여전했다. 어느 날 또다시 아무도 없는 사무실이 되었고 나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느슨해진 붕대를 풀어헤쳤다.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퉁퉁 부어있는 엄지손가락을 보니 스노보드가 생각났다. 다시 일어나 중심을 잡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한 번만 더.’

붕대를 질끈 감았다. 텅 빈 사무실에 타자 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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