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니아 - 온다 리쿠(비채) ●●●●●●●●●○
이 찌는 듯한 무더위.
생물한테서 에너지를 쥐어짜내는, 살기마저 느껴지는 더위.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이 있는 하늘,
그리고 구름의 윤곽만이 흐릿하게 빛나는 찌뿌드드한 하늘의 푸른색.
난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어요. 더워 죽겠다 같은 생각을 하니까, '그럼 죽어버려' 하는 말만 또렷하게 들린 거다, 그렇게 나 자신을 설득하고 겨우 평정을 되찾았어요.
하지만 형이 들은 것도 분명히 그런 목소리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어버려.
형은 그날 아침 그런 말을 들은 겁니다.
그런 식으로 밝고 또렷하게.
그런 목소리로 그런 식으로 시원시원하게 말하면, 누구라도 정말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 걸요.
그래서 형은 네,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스스로 목을 맨 겁니다.
- p. 274. 꽃의 목소리
. 덥다. 7월까지 매일매일 꼬박꼬박 내리던 장마가 그친지도 벌써 20일. 이제 며칠만 지나보내면 아침 저녁으로는 더위가 한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몸에 닿는 후덥지근한 공기는 여전히 버겁다. 그래서 이맘 때에는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를 읽는다. 첫 챕터부터 도시 전체가 찜통에 들어 있는 것 같은 후끈한 열기로 시작하고, 작렬하는 햇빛 속에 모든 게 탈색되며, 현실과 기억 모두가 찌는 듯한 더위로 가득한 가운데 끝나는 이야기. 일종의 이열치열인 셈일까. (그런 의미에서라면 겨울엔 블리자드가 몰아치는 페터 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 적합할테지) 사실 우리 나라의 날씨라면 찐득하고 불쾌지수가 높은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미치오 슈스케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힘드니까. 그래서 에어컨을 끄면 바로 훅훅 찌는 열기가 밀려들어오는 방에서, 오늘은 조금 더 덥구나 중얼거리며 그녀의 글을 읽어나간다. 매일매일 조금씩 넘기는 이 책의 페이지가 끝나면, 어느 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더위가 한풀 꺾여있진 않을까 기대하면서.
. 온다 리쿠의 많은 책들이 그렇듯 추리소설로 읽는다면 이 책은 허술하게 느껴질 것이다. 지역유지인 한 집안의 행사에 모인 사람들이 모조리 독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지며 시작되는 이 이야기에서 추리라는 요소는 거의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이웃집 소녀가 사건을 취재해 책을 내기도 하고, 그 사건을 수사한 경찰의 이야기가 부분부분 나오긴 하지만 딱히 본격적인 수사나 추리과정이 다뤄지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범인은 초반부터 일찌감치 밝혀진다. 유지니아라는 제목도, 백일홍이라는 키워드도, 밝혀지고 나면 낮뜨거울 정도로 유치하다.
. 사실 단편집인 '코끼리와 귀울음' 정도를 제외하면 그녀의 책은 다 그렇긴 하다. 그래서 엄격한 추리 독자 중에서는 온다 리쿠의 글은 추리소설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원래 이 장르의 팬 중에는 약간 락부심과 비슷하게 추리소설 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이 많기 때문에. 특히 이 소설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일본 추리소설 붐이 일어나기 전이라 더욱 그랬다. 떠올려보면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리즈 같은 경우에도 기담이나 괴담이 왜 추리소설 장르에 들어가냐는 의견도 있었고, 지금은 당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코지물들만 해도 이건 추리소설이라기보단 라이트 노벨에 가깝다는 의견도 많았던 시대였으니까. :)
.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래서 그녀의 책을 읽을 때는 전체를 조망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저 하나하나 문장만을 따라간다. '이 찌는 듯한 무더위. 생물한테서 에너지를 쥐어짜내는, 살기마저 느껴지는 더위.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이 있는 하늘, 그리고 구름의 윤곽만이 흐릿하게 빛나는 찌뿌드드한 하늘의 푸른색. 이런 때는 오후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곤 하죠. 순식간에 구름이 낮게 하늘을 뒤덮고, 빗줄기가 길바닥을 철썩철썩 때려요.' 나즈막한 목소리로 짤막짤막하게, 끊임없이 쏟아내는 그녀의 말을 하나하나 읽어가고 있노라면 차례차례 말하는 목소리가 바뀌어간다. 사건을 취재한 동료이기도 하고, 옆집 아이이기도 하고, 그렇게 이야기는 인터뷰에서, 기사에서, 독백으로 차례로 바뀌어간다. 그 과정에서 사건의 윤곽이 하나하나 드러나다 다시 허물어지고, 꿈처럼 아름답고 신비한 형상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또 어느 순간 사정없이 깨져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현실과 환상 속으로 냉혹한 시간이 흐르는 사이, 펼쳐졌던 이야기들은 다시 닫히고,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빈 배경에 모든 것을 태울 듯한 햇발만이 사정없이 내리쬔다.
비굴하게 번득이는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형사나 그 책을 쓴 마키처럼 당신도 내가 그 사건의 범인이라고 생각해서 나한테 접근한 거죠? 그 눈을 보면 알아요. 공소시효도 정지되어 있으니까요. 여기서 내가 고백이라도 하길 기다리는 건가요? 무슨 특종이라도 노리는 거예요? 아니면 준의 죽음에 대해서 복수라도 할 생각인가요?
노여운 척 하지만, 그 표정에는 아양이 어려 있었다.
히사코의 천박한 목소리에 거센 혐오감이 일었다.
이런 여자였다.
과거의 그 신비한 소녀는 이제 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의 스캔들을 파는, 사양길에 접어든 연예인이 되어버렸다. 이런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 기나긴 세월을 바쳤나 생각하니 노여움과 허탈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 p. 383. 파도 소리 들리는 마을
. 그렇게 문장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하얗게 작렬하는 태양과 몸이 말라붙는 더위 속을 뚫고 나와보니, 어느 새 더위가 한풀 꺾여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밤 10시. 26도. 내일 모레 오후부터 한동안은 비. 비오는 날에 맞춰 연차를 쓰고, 창문을 슬쩍 열고 빗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