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뺨을 후려친다. 느닷없이 손을 치켜들었다가, 1초의 백만 분의 1 가량을 멈칫거린 다음 사정없이 그 뺨을 후려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말했다.
"정말이다, 얘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두 번 다시 이곳 꼬락서니를 보고 싶지 않다. 정말이지 여기가 싫어서 미칠 지경이구나. 도대체 내가 왜 이사를 왔는지 모르겠다. 싫은 꼴 안 보게 어서 죽어버렸으면 소원이 없겠구나."
그 때 나는 그 전화통을 붙잡은 채 한 남자가 전신주에 올라가 전깃줄을 만지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었다. 그 남자의 머리 주위로 눈보라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내가 지켜보는 동안 그는 허리에 맨 안전벨트에만 의지한 채 완전히 전신주에서 떨어진 상태로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저러다가 떨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화기에 대고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 p. 182. 상자
. 카버는 삶의 한 지점을 포착하는데 능하다. 그게 슬픈 일이든, 우스운 일이든, 씁쓸한 일이든 카버가 공들여 고른 일상의 짤막짤막한 에피소드들은 삶 자체를 대표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이 소설에 실린 이야기들은 대부분 몇 시간 동안 벌어지는 짧은 사건이거나 때로는 그보다 더 짧은 몇십 분 정도 주고받는 대화들이다. 그 짧은 이야기로 카버는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삶을 이야기해나간다.
. 또한 카버의 이야기에는 겉치레나 자기변명도, 포장이나 과장도 없다. 그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절박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거나, 가정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주행거리는 진짜니?' 처럼 빈곤과 가정불화가 겹쳐진 경우도 있고. 카버 자신이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해왔고, 알콜 중독으로 치료를 받기도 했기에 그의 이야기에는 어떤 것이든 곤궁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뭐랄까. 지어진 지 50년 정도 되어 이젠 곳곳이 허물어져 가는 옛날 다세대 주택의 그 구질구질한 느낌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해야할까. 거기다 그 어려움이 일부 소수의 것만이 아니라, 미국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화이트 푸어의 어려움이기에 우리가 느끼는 어려움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 사실 국내에는 이런 암울한 이야기들보다는 '대성당'이나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 같은 훈훈하고 감동적인 단편들이 유명한 카버지만(물론 나 역시도 이 두 단편을 가장 좋아하긴 한다), 삶이 팍팍해져서 '오늘은 좋은 일이 없네' 하고 중얼거리는 하루가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일상적이고 구질구질한 생활의 냄새가 확 풍겨오는 단편들이 '읽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간만에 이 책을 다시 읽었던 때가 그런 때였다.
레오는 옆으로 돌아누워 그녀의 엉덩이 위에 손을 올려놓는다. 손바닥으로 가만히 어루만져 보니, 그녀의 엉덩이에 긁힌 상처가 잡힌다. 마치 그 상처가 몸 위에 나 있는 도로처럼 느껴진다. 레오는 가만히 손가락을 움직여 토니의 몸을 샅샅이 만져 본다. 문득 그 차를 산 다음날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진입로에 서 있던 그 차를 바라보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 p. 154. 이 주행거리는 진짜니?
p.s. 추가로 이 책에 관련된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나는 카버의 소설을 하루키를 처음 읽던 학생 시절에 하루키의 책에서 접해서 읽게 되었고 그 때부터 동네 도서관에서 집사재에서 나온 카버의 단편집을 몇 번이나 빌렸었는데 - 아마 그 도서관에서 이 책을 가장 많이 빌린 사람이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 정작 몇 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 내가 원하는 책을 마음껏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는 이 책이 품절된 상태였다. 그런 책이 한두권은 아니지만. 스페인 제국사라든가,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 등등....
아무튼 이후 김연수가 번역한 카버 전집이 예쁘장한 표지로 나왔음에도 이 책으로 읽고 싶어서 몇 년을 찾아 헤맨 결과 목동에 있는 어느 개별 서점의 홈페이지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목동까지 찾아가 책장이 노랗게 변색된 책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도 책 정보만 입력된 채로 어디 아랫서고 구석 뒤쪽에 묻혀서 잊혀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 책을 혹시나 그 새에 팔려버릴까봐(그럴리가 없음에도) 서점에 전화까지 해서 꼭 맡아달라고 부탁까지 했으니 직원이 보기엔 참 요란떠는구나 싶었겠지. ^^;
보통의 단행본 신간 한 권이 만이천원 하던 때의, 지금에 와서는 또 옛날의 일이 되어버린 어느 시절의 이야기다. 참고로 이 책 뒤에 찍혀 있는 가격은 6,500원이다. 어휴. 참. :)
"당신 작품 속의 이야기와 일본의 전통적인 단편소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게 아닐까요?"
"예를 들면 어떤 것입니까?"
"예를 들면 말입니다. 어떤 상황이 있는데 - 대부분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상황입니다만 - 거기에 변화가 생기죠. 조용하고 두드러지지 않는 변화 말입니다."
"네, 그래요, 조용한 변화예요."
"그리고 상황도 변하지요. 그러나 본질적인 수준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