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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Sep 01. 2023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고 느릿하게, 그러나 한결같이

의뢰인은 죽었다 - 와카타케 나나미(북폴리오)  ●●●●●●●●●◐


"죽음을 납득할 수 있는 이유 따위,
그 어떤 유능한 탐정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리 없잖아." 



   "설명할 필요도 없겠네만, 우리한테 오는 의뢰인의 절반은 민달팽이 같은 놈들이야. 가끔씩 소금을 듬뿍 뿌려주고 싶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지." 

   "일이니까요."

   "우리 일이 아니니까 그런 거야." 

   씁쓸한 어조였다. 뜻밖에었다. 흥신소 일이 손을 더럽히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았다. 사회와 인간의 더러운 면을 날로 접하는 일도 많다보니, 때로는 턱 밑까지 진창에 잠긴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진창이 몸 안에 축적되는 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장은 그런 단계를 오래 전에 지난 줄 알았다. 

                                                                                                          - p. 13. 짙은 감색의 악마 - 겨울 이야기. 




   . 전작인 '네 탓이야'에서 탐정 하무라 아키라가 세상 어디에든 지뢰처럼 널려 있는 악의를 그녀 특유의 씁쓸하지만 경쾌한 발걸음으로 거침없이 헤쳐나갔다면, 이번 '의뢰인은 죽었다'에서 하무라 아키라는 한결 무겁고 질질 끌리는 발걸음으로 한 발 한 발을 내딛어간다. 끊임없이 기어들어오는 '민달팽이 같은 놈들'과 그들이 물고 들어오는 악의에 탐정은 물론이고 작가 역시도 지쳤기 때문일까. 생각해보며 하라 료나 다른 하드보일드 탐정들과는 달리, 와카타케 나나미의 글은 그저 더없이 현실적인 어둠을 이야기하고, 그 어둠에 극히 현실적으로 반응한다. 거기엔 칵테일 한 잔이나 담배 연기로 흘려버리거나 시원스러운 주먹 한 방에 날아가버리는 악의 따위는 없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악의는 언제고 밉살스럽게 - 혹은 별다른 표정 없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 이번 작품의 하무라 아키라는 - 그리고 와카타케 나나미는 유독 지쳐보인다. 악의 뿐만 아니라 읽는 이들 역시도 겪고 있는 삶의 무게에, 불안한 미래가 그녀의 어깨에 얹혀져 있다. 그래서 하무라 아키라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하루를 보내느라 녹초가 된 채로 비정규직이 느끼는 불안감까지도 떠안아야 한다. 이전 이야기에서라면 만년 아르바이트생인 덕분에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경험도 하고 안팔리는 책도 쓸 수 있었다며 웃고 넘겼을 일들이 이 작품에서는 고스란히 무게감을 가진 채 쌓여간다. 자연히 읽는 이 역시도 그녀의 삶의 무게를 절감하게 되고, 그녀가 겪는 악의 역시도 우리가 삶 속에서 겪는 악의와 공명한다. 더는 남의 이야기로 지나가게 되지 않는다. 




   잘난 척할 처지가 못 된다고 생각했다. 나도 언제 일거리가 없어질 지 모른다고 하세가와 소장에게 위협을 받고도,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도 아니고, 지식을 늘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주어진 일을 하는 것만으로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목욕하고 자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하세가와 탐정조사소에서 주는 일이 없어지면 역시 당황하고 난감해할 것이다. 특히 앞으로 10년쯤 뒤에 없어지거나 한다면. 

                                                                                                               - p. 115. 아마, 더워서 - 여름이야기.



   . 그래서 액자식으로 구성된('나의 미스테리한 일상'에서도 그랬듯, 와카타케 나나미는 이런 구성의 묘미를 가장 잘 살려내는 작가들 중 하나다) 이 작품에서 독자는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목에 짙은 반점이 있는 남자'와 하무라 아키라의 대결에 한껏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오랫동안 마음 속에 짐이 되어 끌어안고 있던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는 대신 그녀의 몇 안되는 지인들의 일에서 잠시 눈을 떼라며 그녀를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정체모를 누군가를 상대로, 하무라 아키라는 그 어떤 때보다 갈등하고 분노를 터뜨리고 만신창이가 되고 결국은 그 무게를 다시 견뎌내야 하게 되지만, 그래도 최소한 자신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스포가 될 수도 있겠지만, 하무라 아키라니까. ^^;). 그리고 그녀의 그런 모습은, 비록 책 속의 에피소드 하나에 불과할지 몰라도 삶에 지친 이에게는 정말 큰 위로가 된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듣고 깨달았기 때문이야. 난 분명히 마리코가 죽은 이유를 알고 싶어. 그렇게 젊고 예쁘고 행복했던 여자가 목숨을 잃어야 한 이유를 알고 싶어. 납득할 수 없었어. 하지만 미즈타니에게 어떤 동기가 있었던 간에 그걸 안다고 불의의 죽음, 평화로운 일상을 동강 내버린 죽음을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죽음을 납득할 수 있는 이유 따위, 그 어떤 유능한 탐정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리 없잖아." 

                                                                                                    - p. 343. 편리한 지옥 - 세 번째 겨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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