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범죄 같은 걸 목표로 하는 사람은 난 범인이 아냐, 아냐.' 하면서 수없이 자기 흔적을 남긴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그 하나라도 반증이 가능하면 꼬리를 잡히게 된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유메노 씨의 경우, 정반대였죠? '나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른 누구였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아.' 라는 식으로 범행을 부정하면 경찰도 항복이라고 해요. 평상시 거짓말하는 방식으로 보면 그렇죠."
- p. 125. 식은 피자는 어떠세요?
. 이 소설. 심상치 않다. 박학다식하지만 멍한 화석매니아 소년과 짝사랑에 빠진 평범한 고등학생 소녀, 후배 여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인 비쩍 마르고 선머슴 같은 친구와 단짝인 귀엽고 모범생 같지만 정작 공부는 그럭저럭인 미소녀까지 네 명의 인물. 그리고 '루피너스 탐정단'이라는 지극히 소녀취향인 어디 만화책에서 따온 것 같은 이름의 모임까지. 딱 보기엔 연애&학원물이 메인이 되고 추리는 적당할 정도로만 넣었을 것 같은데, 막상 사건이 시작되면 공들여 만든 진지한 트릭에 사각을 찔러오는 통찰력까지, 마치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라 쉽게 넘길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덕분에 별 생각없이 슬슬 넘기다 몇 번이나 앞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
. 첫 번째 단편인 '식은 피자는 어떠세요?"는 우선 범인을 제시하고 트릭을 풀어나가는 하우더닛(Howdunit) 류의 소설이다. 어차피 용의자라고 해봐야 둘 밖에 없는데다, 이미 이야기 첫머리에 범인이 누군지 친절하게 나와있지만, 동기나 방법을 떠나 대체 '전날 배달되어 식어빠진 채 달랑 남아있던 피자 한 조각'을 범인이 먹어버린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는 그 부분에 대해 정말 당연하지만 허를 찌르는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 주인공 소녀의 짝사랑에 당최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경찰관 언니와 아웅다웅, 허우대 멀쩡하지만 허당끼가 있는 파트너 형사에 선머슴 같은 친구가 반해버리는 등 일상과 추리가 뒤섞인 유쾌한 분위기로 흘러간다.
. 두 번째 단편 '눈의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눈 덮인 별장에서의 살인사건을 다루는 밀실살인사건이다. 간간이 코믹한 대화가 오가기도 하지만 첫 번째 단편과는 달리 분위기를 사뭇 다르게 가져가면서 조금은 무겁고, 정통적인 본격물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트릭은 체스터튼과 엘러리 퀸이 얼추 뒤섞인 느낌인데, 범인은 납득이 가지만 대체 이런 밀실이 가능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유독 공간에 약하기도 하지만(....)
. 세 번째 단편 '대 여배우의 오른손'은 브라운 신부의 느낌이 나는 이 단편집 중에서도 유독 체스터튼에게 바치는 오마쥬 같은 소설.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이상한 발걸음 소리'나 '폭발하는 책'처럼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선입견으로 인한 사각을 이용한 트릭인데, 억지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트릭을 위해 처음부터 복선을 잘 깔아두었고 나 역시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본 적이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트릭이고 일상을 잘 포착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작가에게도 저런 경험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리고 없어도 상관없었지만 있었기 때문에 더 좋았던 마지막 반전까지. 특별한 장치 없이 인간의 사각만을 다룬 내용이 그렇듯, 살짝 당했다 싶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소설이었다.
. 세 편의 단편뿐이었지만, 충분했다. 진지한 트릭과 소설 내내 가볍게 통통 튀는 대화들이 이야기의 완급을 잘 조절해주고 있고, 학원물답게 캐릭터들도 이야기 속에서 차근차근 성장해가고 있다. 잡학과 화석에는 능하지만 주변을 대하는 데는 서툴렀던 소년은 실패를 겪으면서 인간에 대해 이해해가고 있고, 무미건조했던 선머슴 같은 소녀는 이야기를 통해 점점 감정을 채워나가고 있다. 주인공 소녀의 짝사랑은 성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마 어느 쪽이든 괜찮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