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는 모든 어둠 속에서 괴물의 모습을 찾아낸다.' 불쑥 내 머릿속에 그런 말이 떠올랐다. 어디서 읽은 구절일까? 육아 관련 책인가? 그래서 부모들은 애들이 뭔가를 두려워할 때 무시하고 웃어넘겨서는 안 된다.
그 가르침에 따른다면 혼자서 집을 보는 어린애 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 이 여자를 비웃어서는 안된다. 두려움에 떠는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나는 지푸라기다.
- p. 76.
. 스기무라 사부로는 행복하다. 부유하다는 표현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한 어마어마한 - 무려 '콘체른'이라는 이름이 붙는 재벌가의 사위에, 미인인 아내에, 귀여운 딸에, 골머리 썩을 업무까지는 없는 안정된 직장까지. 아내가 정식 부인의 딸이 아니라서 후계자 자리까지는 기대할 수 없겠지만,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보면 기업 운영이나 조직 내 암투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깔끔하고 맘편하게 한평생 살 수 있는 입장이라 요즘 같은 시대에는 훨씬 선호되는, 말 그대로 'Well-Being 인생'인 셈. 그런데도 재산이나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지켜나가기까지 하니, 이쯤되면 판타지보다도 더 판타지 같다는 느낌도 들고. :)
. 시작은 소소하다. 교통사고, 그것도 자동차도 아니고 자전거 뺑소니라는 영 추리소설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건에, 추리의뢰가 아니라 자서전 출간을 '빙자해' 장인의 죽은 운전기사의 두 딸을 위로해주라는 애매한 부탁을 받으며 시작되는 이야기. 그런 주제에(?) 말랑말랑하거나 달콤한 코지 미스테리도 아니다보니 그저 걷고, 돌아다니고, 탐정도 형사도 아닌 그저 '외부인'으로 여기저기 주변 이야기를 물어보고 돌아다니는 - 딱히 추리나 수사라고 하기도 힘들다 - 어정거림이 한동안 이어진다. 심지어 그 와중에도 아내와 딸 자랑은 빠지지 않는다(....)
. 그런 애매모호한 이야기 속에 문득 이물감이 섞여들었다는 게 느껴진다. 한평생 조용하고 무난했을 것만 같았던 죽은 사람의 삶에서는 흑인지 백인지 영 명확하지 않은 가려진 과거가 어렴풋이 보이고, 마냥 예쁘고 행복한 자매라고 생각했던 두 딸의 모습에서는 단순히 성격차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모습들이 언뜻언뜻 드러난다.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행복한 탐정' 스기무라 사부로의 이야기는 전혀 행복하지 않은 쪽으로 점점 기울어져 간다.
. 그렇게 이야기의 끝에서 '행복하기만 했던 탐정'은 얼핏 보기엔 이해하기 어렵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흔한 악의와 마주친다. 작가는 그런 그의 모습을 통해 보통 사람이 악의를 접했을 때 그에 반응하는 모습을 그려내간다. 아직은 정면으로 마주쳤다기보다는 저 멀리에서 슬쩍 비껴서 본 것에 불과하지만, 타인의 악의를 곁에서 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 속 어떤 부분은 이미 바뀌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후속편이 진행될수록 그 악의는 더욱 깊고, 직접적이고, 음습하게 그를 에워싼다.
나는 웃어보였다. 내 두 발로 제대로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택시 요금도 제대로 지불했다. 그런데도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기도 전에 뻔히 다친 사람으로 보이는 내 모습을 보고 나호코는 깜짝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나호코는 울면서 내 시중을 들었다. 그래서 나도 따라 울 뻔했다. 부모가 서로 부둥켜안고 울거나, 울먹이는 모습을 보며 모모코는 영문도 모른 채 따라서 울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