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이상하다. 표면상으로는 전혀 이상한 것도 없고 사건은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러면서도 무엇 하나 제대로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세세한 부분에는 놀랄만큼 많은 모순과 불합리가 여기저기 박혀 있다. 그것을 총괄해서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불가사의한 힘을 끌어들여야 하고, 그러면 되살아나는 시체나 윤회의 기억까지 전부 다 진실인 것 같은 기분이 드니 이상한 일이다.
- 하권, p. 91.
. 예전에 우부메의 여름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우부메의 여름이 가장 서글프고, 망량의 상자가 가장 끔찍하며, 광골의 꿈이 가장 괴상하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처럼 이번 광골의 꿈은 '괴이'라는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나 괴이하다보니 더없이 참혹한 비극도 비극으로 느껴지지 않고, 까마득한 오랜 세월 동안 몇 겹으로 켜켜이 쌓여온 숙원도, 그 누구보다도 악랄하고 잔인했던 범인에 대한 분노도 빛이 바래져 버리는 느낌이 든다. 거대한 헛소동 속에서 대부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제자리를 도는 장난감 인형처럼 그저 소동에 휘말리고 있을 뿐이고, 진실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이들마저도 허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휘말리기를 선택한다.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헛웃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촌극을 읽고 나니 그저 한심함과 연민이 섞인 탄식만이 남는데, 그러고보면 애초에 광골이라는 요괴의 모습부터가 어딘지 메가리가 없긴 했어. -_-
<책 표지 안쪽에 실린 '광골'의 그림. 우물 속에서 나타나는 해골 요괴인데도 공포스럽다거나 악의에 가득 찬 느낌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져 있는 것처럼 멍해보이는 게 좀 우스꽝스럽다>
. 처음 시작만해도 민간에 전승되는 저주에서부터 소박하게(?) 시작했던 교고쿠도 시리즈는 영능력자, 그리고 과학과의 대립을 거쳐 이번에는 밀교와 대립한다.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나름의 체제를 갖춘 어려운 상대들이 등장하다보니 그만큼 교고쿠도의 제령은 어려워지고 있는데, 여기에 나름 쏠쏠하게 탐정료를 챙겨가는 에노키즈에 비해 헌책방 주인 겸 '기도사'이자 '탐정(자신은 부인하고 있지만)'인 추젠지의 벌이는 오늘도 그냥 그렇다. 꼭 그래서이기 때문은 아니겠지만 이야기 내에서 은근히 '제령'료가 밀렸다며 친우인 세키구치에게 원망을 쏟아내는 모습에는 절로 피식거리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부메의 여름 때에만 해도 사연이 있는 내성적인 소설가 정도였던 세키구치가 점점 사람이 멍해져 가는 게 납득이 가기도 하고. 교고쿠도에게 원망을 듣는다면 나라도 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텐데, 하물며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꾸준히 그 원망이 쌓여가고 있으니.
"흥, 그런 말을 하려면 가끔은 밝은 화제를 들고 등장하는 게 어떻습니까? 제 집은 일요일의 교회도 아닐뿐더러 정신과 의사의 진료실도 아니에요. 게다가 저는 라디오 인생 상담가도, 뒷골목에 은거하고 있는 만물박사도 아니고요. 여행을 가서까지 아츠코가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를 전화로 얘기하고, 돌아와보니 세키구치 군은 울적해하고 있고, 이사마 군은 어울리지도 않게 고민하고 있고, 게다가 이젠 나리까지. 이제 지긋지긋해요!" 지긋지긋하다는 부분에서 주인은 간신히 얼굴을 든다. 여전히 험악한 눈빛이다.
- 하권, p. 137. 이번 권에서도 여전히 투덜거리는 교고쿠도. 세키구치를 빼고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지만. :)
. 광골의 꿈까지의 교고쿠도 시리즈의 트릭을 요약해보자면 '말도 안되는 반칙을 쓰면서 대놓고 이러이러한 반칙을 썼다고 얘기해준다. 그런데도 못맞춘다(....)'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대놓고 힌트를 주는 것만으로 모자라 독자가 헷갈려할까봐 아예 힌트 부분엔 방점까지 찍어주는데다, 상대를 '보기만 하면' 바로 범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에노키즈의 존재까지 있으니까. 우부메의 여름에서는 그냥 헛소리하는 개그캐릭터 정도로 오해했다가 보기 좋게 K.O. 당했지만, 우부메의 여름을 읽고 에노키즈라는 캐릭터에 대해 파악했다면 망량의 상자에서 꽤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 이걸 극복하기 위해 교고쿠 나츠히코가 선택한 것은 장광설과 상식을 사뿐히 넘어서버리는 비상식, 아니 초상식(....)이다. 우부메의 여름과 망량의 상자의 트릭이 좀 너무하다 싶었는지 이번 광골에서는 그래도 '가능성은 있는' 일을 내놓고 있긴 하지만, 사실 확률로 따지자면 에노키즈가 반헛소리로 얘기하는 '네쌍둥이설'이 훨씬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부메의 여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소설에서의 트릭 역시도 단순히 맞고 틀리고를 떠나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니, 이 책을 읽고 턱없이 실망하지 않았다면 꼭 상권을 다시 읽어보길 권하고 싶지만.... 사실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모두들 진상을 알게 되자마자 허겁지겁 상권을 훑어보고 있지 않을지. :)
교고쿠도는 대담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말이지요, 이상한 일이라고는 무엇 하나 없어요. 그렇지, 세키구치 군?"
- 하권, p. 170.
. 교고쿠도 시리즈는 한 권씩 진행될 때마다 사건에 연관된 인물들과 함께 교고쿠도의 주변 인물들 역시 하나씩 늘어나는 특징이 있는데, 이번 광골의 꿈에 나오는 이사마 가즈나리, '이사마야'는 그런 인물들 중에서도 꽤 특이한 캐릭터였다. 겉으로는 - 아니 실제로도 그냥 어수룩한 낚시꾼이지만 묘하게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본다고 해야할까, 별다른 근거도 논리도 없이, 직감만으로 눈속임 뒤에 있는 진실을 보고 있는 인물이다. 다만 그 능력으로 교고쿠도를 돕는다거나, 곤경에 빠진 여주인공을 돕는 히어로처럼 행세하지도 않기 때문에 별 도움은 되지 않지만.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가 때로는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별 필요없는 이야기를 한두마디 던지고 다시 묵묵히 지켜보는 식이다. 아무튼 광골의 꿈은 그런 이사마야에게 여주인공인 아케미가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데서부터 시작하는데, 감기에 걸린 이사마야가 아케미의 집에서 따끈한 계란술을 마시는 분위기가 영 묘하면서도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묵묵하기만 한 이사마야가 왠지 귀여워보여서 혹시 핑크빛 결말이 아닐까 기대해봤지만, 교고쿠도 시리즈에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이 책 정도만 해도, 교고쿠 나츠히코치고는 충분히 친절했다고 봐야겠지. :)
술잔 가장자리는 손가락이 익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만큼 뜨거웠다. 이사마는 등을 웅크리고 고개를 빼서 그 뜨거운 액체를 조금씩 식혀가며 목구멍 안으로 흘려넣었다. 위 언저리가 뜨거워진다. 사실 몸은 따뜻해졌다. 빈속에는 약간의 알코올도 잘 들었다. 얼굴이 뜨겁다. 기분은 좋지만 진정이 안된다. 심장 고동이 빨라진다.
(중략)
아케미는 자세를 완전히 허물어뜨리고, 이사마의 손 위에 그 하얀 손을 짚었다.
오싹할 정도로 차가웠다.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는데.
오늘 아침과 다를 게 전혀 없다. 얼음처럼 차갑다.
옷자락이 흐트러졌다. 이사마가 눈 둘 곳을 몰라 아래를 향하자, 아케미는 몸을 비틀어 쓰러지듯이 이사마에게 등을 기댔다. 이사마는 냄비를 뒤엎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당황해서 아케미를 받아 안았다. 책상 다리를 하고 앉은 이사마의 왼쪽 다리에 오른손을 대고, 아케미는 등으로 이사마에 기댄다. 술잔 한 개가 빙글빙글 두세 번 돌다 쓰러졌다.
아케미의 머리카락에서는 바다 향기가 났다.
- 상권, p. 70, 128. 이러고도 '물론', '당연히' 아무 일 없는 게 이사마라는 인물이라면 대충 가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