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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Aug 14. 2023

한 때, 온다 리쿠의 시대라고 할만한 것이 있었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 - 온다 리쿠(북폴리오)  ●●●●●●●●○○


난 언젠가 꼭 '소설이 열리는 나무'를 찾아내고 말 거야.



   그녀에게 중요한, 지극히 개인적인 테마는 바로 '노스탤지어'다. 온갖 의미에서의 그리움. 그것은 기분 좋게 애달픈 감정이면서, 또한 그만큼 꺼림직하기도 하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세계라는 것에 막연한 향수를 품고 있었다. 향수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면, 세계라는 것이 빙글빙글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순환한다는 감촉이라고 해도 좋다. 기시감과는 또 조금 다른데, 그런 감각이 유년기의 그녀를 많은 부분 지배하고 있었다.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그런 감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지기는 했어도, 가끔 그런 감각이 왈칵 밀려들며 갈팡질팡한다. 그 감각을 어떻게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그는 워드프로세서 앞에 앉아 악전고투하는 것이다.

                                                                                                                                        - p. 315. 회전목마.   




   . 한 때, 온다 리쿠의 시대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 추리소설에서 판타지와 로맨스까지, 장편에서부터 단편은 물론 에세이와 엽편에 이르기까지 장르와 길이를 막론하고 하여간 쓰는 족족 모조리 팔리고 번역되던 시절이었다. 이미지와 노스탤지어를 무기로 아름다운 주인공들이 들려주는 아련하고 감성적인 이야기는 읽는 이들을 무장해제시켰고, 그 앞에서 이런 건 미스테리가 아니라거나, 이야기에 끝맺음이 없다거나, 대책없이 벌려놓기만 한다는 비판은 힘을 잃었다. 그렇게 10여년, 더 이상 출간할 책이 남아있지 않게 된 연후에야 그 광란(?)은 끝을 맺었다.


   . 이 책은 그런 온다 리쿠의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초기 번역작 중 하나다. 정식으로 출판되지 않은 한 권의 책과 그 책을 읽었다는 입소문만을 둘러싼 네 개의 이야기. 아니, 아니다.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처음 두 이야기 정도고, 이어지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이야기에 책의 정체가 드러나는걸까 하고 기대하던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건 완전히 다른 내용의 단편 하나와, 작가의 독백과 한 이야기의 뼈대만을 섞은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기묘한 형태의 글 하나다.


   . 굳이 전체적인 장르를 구분하자면 코지물에 속하긴 하겠지만, 꽤 짜임새 있는 처음의 추리단편을 읽고 이건 내가 아는 류의 이야기라고 안심하던 독자는 당최 알 수 없는 - 지리멸렬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야기에 당황하고, 당혹하며, 더 나아가 온다 리쿠라는 이름에 익숙지 않은 누군가는 이게 무슨 소설이냐며 화를 낼 지도.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익숙한 이야기를 읽던 사이에 어느 새 그녀의 문장에 머리 끝까지 잠겨서 무슨 이야기가 이어지든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맞다. 내 이야기다. :)



   . 그리고 하나 더. 온다 리쿠의 초기 소설들에는 항상 권영주가 있었다. 이 소설 '삼월의 붉은 구렁을' 부터 이 뒤로 이어지는 리세 시리즈와 흑과 다의 환상, 그 이후에 나온 초콜릿 코스모스나 코끼리와 귀울음, 그리고 '유지니아'까지. 그녀의 소설들 중 좋은 평을 받는 작품들에는 항상 권영주의 이름이 같이 새겨져 있다. 아직 온다 리쿠라는 이름은 물론이고 미스테리라는 단어에 감성을 붙이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았던 시설, 권영주가 번역한 온다 리쿠의 문장은 읽는 이를 추억에 빠져들게 하고 긴 여운에 휘감기게 했으며, 그렇게 더 많은 독자를 미스테리의 숲으로 끌어들였다.




   "대단하네. 괴물 같은 소설이야. 그저 그 존재만으로 겹겹이 베일을 둘러가고 있어. 이미 실체도 없고,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데도, 간단히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려. 하지만 진짜 이야기란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몰라. 존재 그 자체에 수많은 이야기가 보태져서 어느 새 성장해가는 것. 그게 이야기의 바람직한 모습일지도 몰라."


   "안 돼. 이야기는 이야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이야기는 제 발로 걸어가면서 차례차례 새로운 전설의 베일을 둘러가는 거야. 이래선 안 돼. 너무 흔해빠졌어. 난 용납할 수 없어. 좀 더 강력한, 좀 더 독창적인 스토리를 찾아야겠어. 난 언젠가 꼭 '소설이 열리는 나무'를 찾아내고 말 거야."

                                                                                                              - p. 191, 그리고 201. 이즈모 야상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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