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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Sep 08. 2023

1300쪽만큼이나 두터웠던 숙원과 주박 사이 그 무엇

철서의 우리 - 교고쿠 나츠히코(손안의책)  ●●●●●●●●◐○


"소승에게는 그 한순간이 없었소."



   구온지 선생님 - 하고, 교고쿠도는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멈춰 있던 시간이 갑자기 흐르기 시작했을 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 구온지 선생님, 당신은 그건 잘 아실 겁니다. 세키구치 군,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나는 이제 그런 것은 싫단 말이야."

   구온지 노인은 순식간에 무언가를 이해하고,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눈두덩을 눌렀다.

                                                                                                                                                  - 3권, p. 432.




   . 그동안 동네의 전설이나 사이비, 길을 잘못 든 과학자, 기껏해야 밀교 정도를 상대하던 교고쿠도가 드디어 이번 편에서 '선종'이라는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다. 덕분에 읽는 이 역시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나 보고 바로 기억 저편으로 보내버려 이제는 기억나는 게 용하다 싶은 돈오니 점오니 하는 낯선 불교 용어들을 떠올려야 하고, 범인 추리만으로 버거운 터에 이야기 내내 던져지는 공안(선문답)의 뜻까지 읽어내야 한다. 물론 선문답이라는 말의 뜻답게, 답 그 자체보다는 작가가 이를 작품에 어떻게 녹여냈는지를 읽어내야 하니, 추측하다보면 기진맥진해질 수밖에 없다.


   . 그렇게 쌩고생을 하다보면 인지도나 국가의 차이가 있는 것뿐이지 이 책에 등장하는 광범위한 잡학이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 그리고 주제에 있어 이 작품이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비해 딱히 모자랄 이유가 있나 감복하게 된다. 굳이 따져보자면 장미의 이름의 무대가 되는 도서관을 포함한 무대장치나 요한계시록에 빗대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성은 장미의 이름이 한수 위, 교고쿠도와 윌리엄 신부의 장광설은 동급. 그리고 분위기나 주제, 대단원의 몰입도는 철서의 우리가 한수 위이지 않나 싶다. 그정도로 마지막에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 범인의 그 헛헛한 자조는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소승에게는 그 한순간이 없었소. 그래서 순식간이라 해도 그것이 찾아온 자에게 질투가 났던 것이오. 분했던 것이오. 참으로 수행이 부족하지요."

                                                                                                                                                  - 3권, p. 456.



   . 세 권, 13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여기까지의 교고쿠도 시리즈 중에서 진입장벽이 가장 높다. 수행과 문답과 깨달음에 대한 얘기에 책의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특히 그 중에서도 25쪽에 거쳐 선종의 역사와 분파를 훑어내려가는 부분은 압권. 여기까지 왔으면 뭘 풀어내든 따라올 수 있는 사람만 남은거겠지 하는 교고쿠 나츠히코 특유의 자신감이 마구마구 폭주하는 와중에 읽는 이들은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장광설에 허우적거리면서 그저 좀비처럼 따라가다 정작 사건의 실체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교고쿠도 시리즈 평소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다. 심지어 이책 이후에 나온 도불의 연회는 또 이 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장광설 대홍수가 펼쳐지니 정말 이렇게까지 떠들면 누가 따라가겠나 싶지만, 나부터도 페이지가 끝날때까지는 이 주박에서 절대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까. :)




    "모든 것이 증명되고 명백해지지 않는 한 과학적 사고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서는 안 되는 걸세. 조만간 모든 것이 해명될거라고 희망적 관측을 늘어놓는다면 괜찮지만, 증명할 수 없는 부분까지 포함해서 다 안다는 얼굴을 하는 것은 교만이거든. 과학적 사고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현재로서 알 수 없는 일은 알지 못하는 채로 놔둘 수밖에 없다는 각오를 하지 않으면 허사일세."

                                                                                                                                                  - 1권, 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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