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시울 Sep 09. 2023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

만나는 것에 대하여 - 무라카미 하루키(문학사상사)  ●●●●●●●◐○○



"그러니까 나중에 한 번 더 전화를 걸어주지 않겠어요?"
"나는 당황하여 그렇게 덧붙여 말했다.
"스파게티를 한창 삶고 있는 중이니까?" 하고 그녀가 말했다.
"네. 그래요."
"혼자서 먹을 건가요?"
"그래요."

 


   꽃가게 앞에서, 나는 그녀와 스쳐 지나간다. 따스하고 자그마한 공기 덩어리가 내 피부에 와닿는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 위에는 물이 뿌려져 있고, 주변에는 장미꽃 향기가 풍긴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 수도 없다. 그녀는 흰 스웨터를 입고 아직 우표를 붙이지 않은 흰 사각 봉투를 오른손에 들고 있다.

                                                        - p. 24.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 하루키의 두 번째 단편집인 '캥거루 날씨'를 번역한 이 단편집에는 하루키의 단편들 중 가장 대중적이라고 할만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판의 제목이자 표제작인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는 하루키의 가장 유명한 단편으로 꼽을 만한(전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인터넷 상에서 부분부분 짤막하게 발췌한 부분들이 자주 보인다) 작품이고, 관계의 단절을 센스있고 실감나게 그린 '스파게티의 해'나 신인상 수상 당시의 논쟁을 비꼰 '뾰족구이', 무너지는 자연과 현실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는 초기 하루키치고는 꽤나 이질적인 단편인 '5월의 해안선', 그리고 훈훈함이 가득 넘치는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까지 하루키를 모르는 독자라도 어디선가 일부분 정도는 봤을법한 유명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 이 책의 단편들은 막 문체 위주의 글에서 스토리 위주의 글로 넘어가던 '양을 쫓는 모험' 전후에 쓰여진 단편들인데, 그래서 첫 단편집인 '중국행 슬로보트'와 비교해보면 다른 작가가 썼다고 해도 믿겨질만큼 다르다. 추상적인 느낌이 강했던 첫 단편집과는 달리 훨씬 직관적이고, 재미있고 평이하게 이야기가 흘러간다. 물론 그 와중에도 '농병아리'처럼 이건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싶은 단편도 있긴 하지만, 그 역시도 읽고 나서 드는 의문이지 글 자체가 어렵게 읽히거나 하는 것은 아니니까.




   담배를 세 모금 정도 빨고 나서 갑자기 기묘한 사실을 깨달았어. 즉 거울 속의 형상이 내가 아니라는. 아니지. 겉모습으로는 완전히 나였지. 그건 틀림없어. 하지만 그건 절대 내가 아니었어. 나는 그걸 본능적으로 알았어. 아니지, 틀렸어. 정확히 말하면 그건 물론 나였어. 하지만 그건 나 이외의 나였단 말이야. 그것은 내가 그렇게 존재할 수 없는 형태로서의 나였단 말일세.

                                                                                                                                                   - p. 84. 거울



   . 그래서 이 단편집은 하루키와 - 아니, 문학 자체와 서먹서먹한 주변 사람들에게 그러면 부담갖지 말고 이것부터 읽어보라고 권할 수 있을 정도로 말랑말랑하다. 거기다 하루키를 읽어본 사람들에겐 양을 쫓는 모험처럼 하루키의 전환점이라 할만한 시기에 나온 단편집인만큼 당연히 읽어봐야 하고. 그러니 결국 이래저래 추천이다. :) 참고로 내 베스트 단편은, 종종 바뀌고는 있지만 지금으로선 '스파게티의 해'다. 정말 짤막해서 서점에 선 채로 후딱 읽을 수 있으니 꼭 읽어보세요. ^^




   "그러니까 나중에 한 번 더 전화를 걸어주지 않겠어요?"

   나는 당황하여 그렇게 덧붙여 말했다.

   "스파게티를 한창 삶고 있는 중이니까?" 하고 그녀가 말했다.

   "네. 그래요."

   "혼자서 먹을 건가요?"

   "그래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정말 곤란한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해요."

   "돈 문제도 있고요."

   "네."

   "돌려받았으면 좋겠어요."

   "미안하지만."

   "스파게티 말이군요."

   "네."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계세요." 하고 나도 말했다.

   전화를 끊었을 때 바닥 위에 있던 빛의 풀은 몇 센티미터인가 이동해 있었다. 나는 그 햇살 속에 한 번 더 드러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p. 174-5. 스파게티의 해에



  p.s. 그나저나 이 책의 제목은 너무 긴데 브런치의 제목 입력란은 한정되어 있다보니(....) 어쩔 수 없이 제목과 소제목란에 책 정보를 모두 할애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적어놓고 보니 또 그럴싸한 거 같아 나쁘지 않네요.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