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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Sep 17. 2023

단정한 이야기들 사이로 떠올려지는 희미하고 둔한 통증

개똥벌레 - 무라카미 하루키(창해)  ●●●●●●●●●◐


나는 몇 번이나 그런 어둠 속에 살며시 손을 뻗쳐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 가느다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 조금 앞에 있었다.




   가을이 끝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그녀는 가끔 내 팔에 몸을 기댔다. 더플 코트의 두꺼운 천을 통해 나는 그녀의 입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언제나처럼 걷기만 했다. 나도 그녀도 고무창을 댄 구두를 신고 있었기 때문에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싹 마른 플라타너스 잎을 밟을 때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누군가'의 팔이었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체온이 아니라 '누군가'의 체온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녀의 눈은 그전보다 더 투명하게 느껴졌다. 아무데도 갈 곳 없는 투명함이었다. 때때로 그녀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 눈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슬퍼졌다.

                                                                                                                                             - p. 32. 개똥벌레




   . 다섯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는 이 얇은 책은, 하루키의 단편들 중에서 고르라면 아무 고민없이 최고라고 꼽을 수 있을 단정하게 정제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특히 '노르웨이의 숲'의 출발점이 되는 '개똥벌레'나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는 흔히 하루키하면 기대되는 감성이 가장 깊이 묻어나는 단편이다. 아직 하루키의 책을 전부 읽은 것이 아니라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하루키의 장편과 단편, 에세이, 인터뷰들까지 모두 한데놓고 뽑는다고 해도 저 두 단편은 내 베스트 5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그런 침묵의 공간에 떠도는 빛의 입자를 바라보면서 나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려고 애썼다. 누구나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있다. 그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 다음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손을 내민 바로 그 앞에는 막연한 공기의 벽만이 있었다.

                                                                                                                                              - p. 34. 개똥벌레



   . 거기에 이야기 내내 경쾌한 템포로 흘러가는 '춤추는 난장이'와 영화 '버닝'의 모티브가 된 '헛간을 태우다' 역시 훌륭한 단편들이다. 특히 헛간을 태우다는 무려 35년 전(!!!!)의 작품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감각적인데, 장기불황 전 일본의 호황기를 배경으로 하다보니 현재 젊은 층의 가난과 그로 인한 박탈감을 다루는 버닝보다는 멀게 느껴지지만 단정하고 유쾌한 인물 뒤로 음습함을 슬쩍슬쩍 비추어보이는 솜씨는 영화보다 더 세련되게 느껴진다. 이정도로까지 만족스럽게 읽고 나면 이 단편집에서 유독 이질적이었던 '세 가지 독일 환상'도 오히려 낯설다는 점에 힘입어 한 번 읽어내볼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름은 한두 번 들어봤는데 하루키라는 작가가 대체 어떤 작가에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앞서 읽었던 '캥거루 통신(4월의 어느 맑은-)'과 함께 가장 추천하기에 적합한 책이 아닐까.


   . 누구나(라고 하면 좀 과장일까) 어느 때에든 욱신거릴 수 있는 부분을 덮어둔 채 지내고 있고, 하루키는 그런 이들을 상대로 개똥벌레나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같은 단편에서 - 이 책을 간만에 다시 읽었을 때는 장님 버드나무 쪽이 좀 더 깊이 다가왔다. 날씨가 서늘해지면 개똥벌레 쪽도 와닿는다 - 그런 부분을 들춰 사정없이 꾹꾹 눌러댄다. 그래서 홀로 조용한 시간을 내어 이 단편들을 읽어나갈 때면 잊은 척 하지만 실제 잊어버리기엔 너무도 낯익은 둔통 비슷한 것이 찾아오고, 다 읽고 나면 멍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런 이야기들이다.




   나는 그런 바람에 대해 - 이 경사지를 휩쓸고 가는 풍요로운 초여름의 바람에 대해 - 사촌동생에게 설명할까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는 아직 열네 살로 이 땅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인간에게 잃어버린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p. 124.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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