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시울 Sep 10. 2023

화려하고 찬란한 '백주' 아래 진짜 악의 모습

백주의 악마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악은 지상에서 떠돌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만으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에르큘 포와로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펴서 허공에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당신이 적을 한 명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당신이 그를 주택가나 사무실, 거리 등에서 찾아다닌다면 - 당신은 이유를 대야 합니다 -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바닷가인 이곳에서는 아무도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지요. 당신은 지금 리더콤 만에 있습니다. 왜죠? 지금은 8월입니다 - 사람들은 8월이면 바닷가에 갑니다 - 사람들은 대개가 휴가중에 있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있는 것도, 레인 씨가 이곳에 있는 것도, 바리 소령, 레드펀 부부가 이곳에 있는 것도 모두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영국에서는 8월에 바닷가에 오는 것이 관습이기 때문이지요. 

                                                                                                                                                            - p. 18.




   .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크리스티 여사는 포와로의 입을 빌려서 여름 휴가지야말로 범죄에 적합한 곳이라는 지론을 내세우는데, 그 내용이라는 걸 보면 피해자 근처에 있었던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도시와 달리 휴양지의 경우는 '그냥 휴가차 온건데요. 아이구. 우연이네요.' 라고 얘기하면 되니 얼마나 간단하냐는 것이다. 이쯤되면 병 아닌가 싶기는 한데(....) 그래서인지 여사님의 작품 중에선 여름 휴양지를 배경으로 쓰여진 작품이 꽤 된다. 얼마 전 다뤘던 '나일 강의 죽음'이라거나, '로도스 섬의 삼각형'(죽은 자의 거울에 실려있는 단편이다)도 그렇다. 그리고 이 백주의 악마는 저 두 작품을 섞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 육감적인 매력을 갖춘 유부녀와 우울해보이는 남편, 그리고 그녀를 둘러싸고 묘한 삼각 관계에 빠지는 남자와 또 그의 부인(....) 이라는 전형적인 막장 관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앞에서 언급한 '로도스 섬의 삼각형'과 거의 같은 구도고, 그래서 책을 읽은 입장에선 똑같이 가게 될 지 아니면 마지막에 비틀기가 있을지 흥미로워진다. 또한 여사님의 이야기 대부분이 그렇듯 트릭까지 맞추기는 쉽지 않지만, 범인에 대해서라면 위화감이 드는 부분을 꽤 친절하게(?) 제공하고 있으니 꼼꼼하게 파고들어가다보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 이 소설을 끝으로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는 '13인의 만찬'에서부터 시작되는 1930년대 포와로 시리즈를 어느 정도 일단락 짓는데, 이 소설 이후 정말 오랜만에 토미와 터펜스 부부를 불러내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마플 양이 나오는 이야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포와로 역시도 상류층을 상대로 한 기존의 화려한 사건에서 서민들의 문제에 뛰어들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잘 알려진 헤이스팅즈나 제프 경감 대신 애리어든 올리버 여사('테이블 위의 카드'에 나왔던)의 비중이 점점 늘어간다. 이런 변화를 거치면서 나온 걸작이 '비뚤어진 집'이니, 이후 작품들도 꾸준히 읽어볼만하다. :)



   . 참, 이 소설의 원제는 'Evil Under the Sun'인데, 해문 판이든 황금가지 판이든 '백주'라는 꽤 고풍스러운 제목을 붙이고 있다. 해문 판이야 워낙 오래전에 나온 번역이니 그렇다치더라도 황금가지 판도 이 제목을 쓰는 건 꽤 이채로운데, 평화로운 휴양지 해변가에서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악의와 그 속의 섬뜩한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딱인 제목으로 여겨졌나보다. 




   p.s.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단연 야성적이고 육감적인 아레나 마샬일텐데, 40년 전에 나온 1982년 영화에서는 다이아나 리그 여사가 맡아서 거의 똘끼(....)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대담한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그래서 그 다이아나 리그 여사가 누구냐면....




   이 분이시다. 왕좌의 게임에서 어마어마한 포스를 보여주는 올레나 티렐.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