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클 애브너의 지혜 - 멜빌 포스트(동서문화사) ●●●●●●◐○○○
"법의 권위는 군의 유권자들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유권자 여러분은 일어나주실 수 없겠습니까?"
판사는 얼굴이 빨갛게 되어 끝까지 권위를 행사하려고 필사적이었다. 책상을 쾅쾅 치며 모두 퇴정시키라고 보안관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보안관은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 역시 용기가 모자란 사람이 아니었으며, 인민과 맞서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을 때는 단호하게 맞섰으리라 생각된다. 그 태도는 흔들리는 일이 없고, 조금도 애매한 데가 없었다. 그는 판사의 명령에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판사는 목소리를 높여 보안관을 꾸짖었다.
"여기서는 내가 법의 대표자요. 무얼 우물쭈물하고 있소!"
보안관은 평범한 사람으로서 제퍼슨 대통령의 교묘한 말 따위는 알 턱도 없었지만, 그때 그가 한 대답은 제퍼슨이 쓴 것보다 더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전 같으면 법의 대표자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만, 지금은 법 그 자체 앞에 서 있기 때문에 당신의 명령에 따를 수 없습니다!"
- p. 323. 나보테의 포도원
. 원래 추리소설은 에드거 앨런 포에 의해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영국에서 셜록 홈즈가 대히트를 친 이후 엘러리 퀸과 딕슨 카, 하드보일드 작가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추리소설은 유럽을 중심으로 쓰여지고 있었다. 떠올려보면 팬들의 부탁과 애원과 협박에 못 이긴 코난 도일이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떨어진 홈즈를 되살려내고, 체스터튼이 땅딸막하고 우산을 자주 떨어뜨리는 수더분한 신부님을 생각해내고, 바다 건너편에서는 괴도 뤼팽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던 이 시기에 미국에서는 딱히 기억될만한 작가나 작품이 없다. 그나마 그 불모지에서 기억될만한 탐정이 거친 개척시대를 헤쳐나가던 투박하지만 지혜로운 탐정 엉클 애브너다.
. 멜빌 데이비슨 포스트는(브런치의 제목 글자 수 제한 때문에 미들네임을 뺐다) 엉클 애브너를 통해 초기 미국의 정신인 청교도와 법치, 그리고 개척정신을 그려낸다. 목석 같은 얼굴에 강철 같은 근육을 가진 엉클 애브너는 겉보기에는 거칠고 투박해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뛰어난 지혜와 독실한 믿음을 지녔고,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정의에 대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다만 지금과는 시대가 좀 다르다보니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에도 조금은 차이가 있어서, 어떤 단편에서는 홀로 어린아이를 키우는 노인의 살인을 눈감아주기도 하고(이 쪽은 동정할만한 여지가 좀 있었다) 다른 단편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겠다며 범죄자를 그냥 풀어주기도 하는 등(이 쪽엔 그런 여지조차 없었다) 지금 시각에서는 뭔가 이상하다 싶은 모습도 보여진다.
. 사실 시대적 배경이 이질적인 것뿐 아니라 이야기 자체도 너무 옛스럽고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긴 홈즈 시리즈만 해도 지금 읽으면 몇몇 단편은 영 시시한데 싶고, 뤼팽 시리즈 같은 경우는 몇몇 수작들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손발이 오그라드는데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평범한 소설들이야 오죽할까. 그래서 엉클 애브너라는 캐릭터는 참 매력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읽기에는 좀 밋밋한 게 사실이다.
. 하지만 '나보테의 포도원'만큼은 지금도, 그리고 더 시간이 흐르더라도 꾸준히 걸작 반열에 이름을 올릴만한 작품이다. 죽은 노인을 두고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에 대해 품은 오해와 희생을 트릭으로 사용한 것도 훌륭하고(이런 방식은 이후에도 꾸준히 차용된다), 그 시대의 법정과 마을공동체에 대한 묘사도 생생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의자로 지목된 판사를 상대로 엉클 애브너가 법정의 방청객 앞에서 "법의 권위는 유권자들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유권자 여러분은 일어나주실 수 없겠습니까?" 라고 묻자 방청객들이 하나하나 일어나는 장면은, 추리소설 독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꼭 읽어보길 적극 권해줄만한 명장면이다. 이 단편 하나만으로, 밋밋한 단편들을 참아가면서 페이지를 끝까지 넘겼던 게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이 단편이 맨 앞에 실려있었다면 그 감동의 여운으로 밋밋함을 참아낼 수 있었을테고. 그 정도의 힘을 가진 단편이었다.
맨 먼저 일어난 사람은 랜돌프였다. 그는 치안관으로, 거만하고 허영심이 강하며, 이어받지도 못한 조상의 재능을 내세우는 사람이었다. 그 천박한 인품은 엉클 애브너에게 고민의 씨앗이었다. 그러나 나중 일이야 어찌되었든, 여기서는 이 점만을 말해두고 싶다. 그 편협과 허영의 밑바닥에도 남자다운 면목이 있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하든 주위에는 눈 한 번 돌리지도 않고 자기 혼자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일어나 태연히 판사를 쳐다보았던 것이다. 이로써 나는 똑같은 사람이 때로는 못난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용감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p. 322. 나보테의 포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