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상 - 시오노 나나미 ●●●●●●●●○○
'군웅할거'라고 말하면 영웅들이 서로 맹렬히 싸운 것처럼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옥'은 거의 없고 '돌'들만 부딪치고 있었던 시대일 뿐이다.
신용도가 높고 항상성도 갖추고 있어서 경제 진흥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금화는 역시 경제 입국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발행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금화 발행은 '사하라의 황금' 수입이 보장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묘지에서 발굴한 인골을 조사해보면 중세 전기에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체격이 갑자기 왜소해졌다가 중세 후기에 접어든 뒤에 고대 로마 시대의 수준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금화가 돌아온 시대와 겹치는 것 같아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 p. 294. 사하라의 황금
. 15권에 달하는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는 로마 멸망이 아닌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의 죽음, 그리고 그 빈틈을 노린 랑고바르디 족의 이탈리아 남하로 끝이 난다. 그리고 이 책은 그 뒤에 이어지는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 간의 지중해를 사이에 둔 천 년 가까운 혈투를 다룬다. 상권에서는 로마가 빠져나간 북아프리카를 거점으로 삼아 지중해 남쪽을 장악한 이슬람 세력 '사라센'의 대공세와 이에 대응하는 기독교 세력 간의 사투 및 이에 이어지는 십자군 전쟁을 다루고, 하권에서는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본격적으로 지중해에 진출을 시도하기 시작한 오스만투르크와 기독교 국가들 간의 공방을 다루고 있다. 사실 상권의 절반 정도까지는 사투라기보단 로마 멸망 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기독교 세력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것에 가깝긴 하지만.
. 사실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글에 대해서는 그 유명세에 비해 오류나 빈틈이 지적되는 부분이 많고, 나 역시도 리뷰를 통해 로마인 이야기의 오류나 일방적인 시각에 대해 종종 지적하고 반박했지만, 그래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 중에서 두 가지는 새겨들을만하다. 우선 지중해 세계에 한정하자면, 중세 천년 중 최소 앞서의 500년, 좀 더 길게 잡자면 2/3 지점인 700년 정도는 '암흑' 그 자체였다는 것. 그리고 한때 십자군과 관련해서 종종 이야기되던 '평화롭고 조용히 살던 이슬람 세력에 대한 서구의 광신적이고 일방적인 침공' 같은 구도는(특히 9.11 이후로 이런 시각의 책이 꽤 많았다), 그 시대에 했다간 어느쪽에서든 맞아죽기 딱 좋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는 것이다.
.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죽음 5년 후에 마호메트가 태어나고, 마호메트의 죽음을 기점으로 이슬람 세력은 말도 안되는 속도로 확대된다.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다음 해에 이미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시리아를 빼앗고, 그 5년 후에는 또 이집트를 빼앗는다. 그 결과 이슬람교가 만들어진 지 1세기만에 지금의 중동과 이집트, 북아프리카 전체에다 스페인까지도 이슬람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렇게 지중해의 서부와 남부를 얼추 장악한 이슬람 세력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중해 저 편의 시칠리아와, 그 너머에 자리잡고 있는 이탈리아였다. 지중해 북부의 기독교 세력에 있어서는 본격적으로 지옥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상권의 앞부분은 이슬람 세력의 끈질긴 시칠리아 공략과, 몇백년간 끝없이 계속되는 이탈리아 본토에 대한 약탈과 전쟁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워낙 그 기간이 길고 이슬람 세력의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지다보니, 그냥 기록과 일화를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책의 1/3 정도가 꽉꽉 채워진다. 로마가 점령당하지 않았던 게 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마치 고려 말기 왜구의 준동처럼 이슬람 세력은 해안가 뿐만 아니라 내륙까지 약탈했고, 그 점령지가 이탈리아 남부는 물론 로마 코앞의 항구도시에 이른 적도 있었다.
. 또한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목욕장'의 노예로 끌려가는 참극이 벌어지고, 결국 이탈리아 반도의 길고 긴 해안 지방은 사람들은 사라지고 탑 몇 개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로 텅 비어 버린다. 아말피,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같은 항구도시들이 해군을 양성해서 이슬람 해적과 맞서고, 사라센보다 더한 노르만족이(바이킹의 그 노르만족이 맞다) 등장해 시칠리아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몇백년 동안 그런 상태가 이어졌다.
. 세세하게 서술된 중세 초중반의 이야기들을 읽고 있자면 광신이나 욕심이 아니라 침략자에 대한 분노만으로도 온 유럽이 일어나는 게 당연했다는 걸 느끼게 될 정도의 참상이었다. 물론 콘스탄티노플로 빠져버린 4차 십자군 같은 흑역사도 있었지만, 십자군을 통해 양과 규모를 결집하고 활용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 유럽 세계에 위협을 느껴서인지 실제로 십자군 시기를 거치며 지중해에서 개별적인 '약탈'이 아닌 위협적인 '세력'으로서의 해적의 위협이 사그라들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오스만 제국이 본격적으로 지중해에 손길을 뻗어오는 3-400년간 지중해에는 균형 비슷한 것이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 균형을 토대로, 르네상스의 싹이라고 할만한 것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군웅할거'라고 말하면 영웅들이 서로 맹렬히 싸운 것처럼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옥'은 거의 없고 '돌'들만 부딪치고 있었던 시대일 뿐이다. 이 중세를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신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유쾌한 일도 있다. 한줌밖에 안되는 남자들이라도 많은 면에서 행운을 얻으면 역사를 뒤집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그 좋은 예가 노르만인의 도래였다.
- p. 225. 노르만인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