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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Jul 13. 2024

음모가였고, 군인이었고, 정치가였다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 시오노 나나미  ●●●●●●●○○○


"이탈리아의 불화의 원천을 멸망시킨 거지."
마키아벨리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이탈리아요?"
"그렇지, 이탈리아요."



   20일 밤, 우르비노 교외의 한 마을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저녁을 들고 있던 구이도발도에게 진흙투성이가 된 전령이 달려왔다. 체사레의 군대가 곧장 이쪽을 향해 진군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폴레토에서 우르비노까지는 산길로 80킬로미터나 된다. 설마하는 생각으로 구이도발도는 전령의 보고를 일소에 붙이고 문제삼지 않았다. 제2의 전령이 도착했다. 그 보고를 접하고서야 비로소 구이도발도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전령은 전했다. 체사레는 이미 칼리에 도착했으며, 아마도 내일 아침쯤이면 우르비노 시내에 들어올 것이라고. 다시 제3의 전령이 도착했다. 우르비노가 이미 체사레 군에 포위당하고 말았다는 것을 알려온 것이다. 무서운 진군 속도였다.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서, 그것도 한밤중에! 

                                                                                                                                                     - p. 185. 칼




   . 시오노 나나미의 '르네상스의 여인들'에 실린 네 개의 챕터 중 세 개의 챕터에는 체사레 보르자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것도 동떨어진 시대를 다룬 카테리나 코르나로 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15세기 말과 16세기 초를 배경으로 하는 세 이야기에는 모두 등장하는 것이니,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반의 이탈리아에는 아주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체사레 보르자의 시기'라고 할만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 알렉산드르 6세의 사생아로 추기경이자 군인이었고 통치자였던 체사레 보르자. 비록 교회를 떠나 군대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활동한 건 5년이 겨우 넘는 짧은 기간이었고, 영토로 따지자면 이탈리아의 1/4가 될까말까한 작은 땅이었지만 샤를 8세의 침공을 계기로 온 유럽의 관심이 이탈리아에 쏠려 있는 상황에서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청의 작은 땅에서 시작해 열강들 사이에서 자생할 수 있는 '이탈리아'를 만들기 직전까지 갔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이탈리아'가 완성될 찰나, 불운과 재해와 실수가 겹치며 그가 이룩했던 모든 것은 한순간에 와해되었고 그는 배신을 당하고 오판하기를 거듭하다 스페인의 변방에서 허무하게 전사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31세. 심지어 그가 꿈에 가장 근접했던 때의 나이는 겨우 스물 일곱이었다. 




   한밤중이 다 되어 횃불 몇 개에 비친 쓸쓸한 장례 행렬이, 산타 마리아 델레 페브리 성당의 묘지로 향하고 있었다. 주교 한 사람과 몇몇 보조 사제들, 그리고 조객 몇 사람이 뒤를 따랐다. 매장 때, 퉁퉁 부어오른 교황의 시신이 미리 마련된 관에 들어가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억센 인부 두 사람이 발로 꾹꾹 밟아 억지로 쑤셔넣어야 했다. 지하 석벽에 흔들리는 횃불 빛이, 쑤셔넣을 때마다 튀어오르는 시체의 흉한 모습을 무시무시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간신히 관 뚜껑이 닫히고, 매장이 끝났다. 참석자들은 불을 끄고 침묵 속을 걸어 총총히 그 자리를 떠났다. 묘소 출구의 철문이 그런 그들 뒤에서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 p. 283. 흐르는 별

   



   . 그러니 당연히 당시 신인작가로서 야심을 품고 르네상스의 정치를 배경으로 화려하고 극적인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던 시오노 나나미가 체사레 보르자를 놓칠 리 없다. 더구나 이미 르네상스의 여인들에서 '음모가'로서의 체사레 보르자를(루크레치아 보르자 편), '장군'으로서의 체사레 보르자를(카테리나 스포르차 편), 그리고 '정치가'로서의 체사레 보르자를(이사벨라 데스테 편) 차례로 다뤘기에, 남은 것은 세 이야기를 하나로 묶고 중간중간의 디테일을 조금씩 채워가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이 책이다. 


   . 냉혹한 음모가이자 노련한 장군이자 장대한 전망을 지닌 정치가였던 체사레 보르자. 비록 시작은 추기경이었기에 야망을 이룰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지만 냉혹한 음모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 장군으로서 흩어져 있던 교황령을 차례차례 점령해가고, 정치력을 발휘해 이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그런 과정이 마치 전쟁게임을 하는 것처럼 쓰여져 있고, 그렇기에 이 책은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책 앞에 실린 이탈리아 지도에 책갈피를 끼워둔 채 체사레가 점령한 책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책을 덮고 나서는 게임을 켜고 우르비노나 페라라처럼 그 전까지는 들어본 적도 없던 중세 이탈리아 소국의 영주를 선택해 군대를 키우고 내정을 하고 형제를 암살하면서(?) 주변 국가들을 하나하나 집어삼킨다.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가 이루지 못한 이탈리아 왕의 꿈을 이룬다(....) 그게 끝이 아니다. 여행을 할 기회가 생기면 당연히 가야 한다는 나폴리 같은 곳은 제껴두고 별다른 인지도도 없는 페라라 같은 곳을 굳이 코스에 집어넣는다. 그렇게 덕후가 되어간다. 무서운 책이다. :) 


   .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의 르네상스 세계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중요한 비중을 가지고, 혹은 한두 줄로 등장하는 세 교황의 이야기는 그대로 '신의 대리인'으로 이어지고, 체사레 보르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공무원의 이야기는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또다시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파생되는 걸 보고 있자면, 시오노 나나미에게 있어 체사레 보르자라는 인물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알게 된다. 

   p.s. 책을 읽고 체사레 보르자나 그 주변 인물에 대해 매력을 느끼셨다면, 소료 후유미의 만화 '체사레'나(국내에는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존 도먼이 알렉산데르 6세를 맡은 '보르지아' 시리즈 1부를 추천합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도 '이탈리아 삼국지'라는 이름으로 짤막하게나마 그 시대가 다뤄지고 있습니다. :)   




   밤 2시, 마키아벨리는 체사레를 만났다. 체사레는 환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나의, 그리고 당신들의 적이기도 한 그들을 멸망시킬 수 있어서 기쁘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탈리아의 불화의 원천을 멸망시킨 거지." 

   마키아벨리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이탈리아요?" 

   "그렇지, 이탈리아요." 

                                                                                                                                                     - p. 260.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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