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과 말과 길의 이야기

남한산성 - 김훈(학고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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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때는 모여서 먹어도 똥은 각자 내지르는 것이옵니다.



그 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 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그 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 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오다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 p. 37. 언 강.




. 1637년 1월, 임금은 산성에 있었다. 송파나루를 건너 십리 밖 산에 기대있는 성은 가팔랐으되 작고 외로웠고, 길은 좁은 한길이어서 적을 막기에 용이했으나 나갈 방도가 없었다. 공기는 차갑고 말라 가루눈이 흩뿌렸고, 바람은 가볍고 날이 서서 밤새 번을 서는 병사들의 귀에 생채기를 내고 지나갔다. 병사는 추위에 떨었고, 신하들과 임금은 치욕과 두려움에 떨었다.


. 김훈은 그 특유의 문장으로 임금이 남한산성에 들어왔을 때부터 나갈 때까지의 47일을 풀어낸다. 이미 벌어질 일을 예감한 것인지 말이 없는 임금. 그를 사이에 두고 무거운 죽음으로 가벼운 삶을 초월해야 한다는 상헌과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할 수 없다는 명길이 맞선다. 김류는 그런 그들을 방관하며 홀로 버텨야 할 시기와 나가야 할 시기를 가늠한다. 그러나 그들의 논의와 상관없이, 시간은 성 안에 갇혀있는 이들에게 냉혹하고 무심하게 한결같은 속도로 흘러갈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갈 수록 청의 군은 모여 강성해지고 조선의 군은 흩어진 채 쇠미해진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프다.





문장으로 발신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말들의 산맥 너머는 겨울이었는데, 임금의 시야는 그 겨울 들판에 닿을 수 없었다.

- p. 15. 눈보라.


칸은 붓을 들어서 문장을 쓰는 일은 없었으나, 문한관들의 붓놀림을 엄히 다스렸다. 칸은 고사를 끌어대거나, 전적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칸은 문체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 칸은 늘 말했다. -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 p. 308. 물비늘.





. 황급히 몽진하느라 모양만 겨우 갖춘 어전에서는 삶과 죽음과 길과 말의 논의가 오가지만, 그 수많은 말들은 강화도가 떨어지고 지방에서 힘겹게 올라온 원군이 족족 참패했다는 사실에 오그라든다. 그 위로 청태조 홍타이지는 접지도 구기지도 않은 채 올곧게 펴서 내지른 말로 남한산성을 옥죈다. 그 말 앞에서 김류는 말할 것도 없고, 상헌의 말조차 오늘에 와서 읽기엔 공허하게 느껴진다. 어떻게든 둘의 말을 맞겨루게 하려는 심산이었는지 책의 뒤에는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라는 크고 굵은 글씨가 박혀있지만 이미 우리는 죽어서 사는 것이 공허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 더구나 죽음을 요구하기엔 병사들의 추위를 막기 위해 준비했던 가마니를 올올이 풀어 말을 먹이고, 병사들이 동상에 쓰러지는 가운데 결국 말 역시도 굶어 죽어가는 장면은 실소를 자아낸다. 김훈은 후기에 모 인물의 말을 빌어 '명길을 긍정하지만 그것이 상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칼을 빼든 도승지 앞에서 "승지가 칼을 빼니 산천이 떤다며" 그 기세로 적 앞으로 나아가라는 병사들의 악받친 조롱 앞에서는 작가의 말조차 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병사들의 악은 당하관들의 울음을 덮는다. 산성 안의 말로는 산성 안의 병사들조차 다스릴 수 없다. 당시의 병사들조차 다스릴 수 없었던 말로, 어떻게 수백년 후의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을까.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생을 가벼이 여기는 자이옵니다. 갇힌 성안에서 어찌 말의 길을 따라가오리까.

- p. 160. 웃으면서 곡하기.





. 그래서 오늘의 우리에게 다가오는 말은 죽음의 말이 아닌 삶의 말이다. 서날쇠는 삶의 말을 하는 이다. 그가 하는 삶의 말 앞에서는 명길의 말조차 얄팍하게 느껴진다. 나라가 아닌 대장간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성에 남은 그는 없는 쇠로 나무를 자르기 위해선 도끼보다 톱이 편하다 말하고 찬 날씨에 똥을 징발해봐야 곡괭이로 찍어 던져야 하는 똥은 돌멩이만 같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허비하지 않은 똥을 밭에 뿌려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그런 그에게서는 어디 하나 접히고 공허한 말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상헌이 끌려가고 명길이 굴욕의 서한을 쓰고 임금이 이마를 찧은 자리에 서날쇠의 삶이 남아서 읽는 이들을 위로한다. 그로 인해 읽는 내내 접고 구겨진 채로 얄팍하기 이를 데 없어 둥둥 떠다니던 말에 휘둘렸던 이들은 마지막에 이르러 간신히 발을 땅에 붙일 수 있게 된다.




먹을 때는 모여서 먹어도 똥은 각자 내지르는 것이옵니다. 구덩이를 파고 모여서 누라 하들 참았다가 누거나 멀리 가서 눌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더구나 똥은 독물인지라 손대기가 어렵습니다. 열 말 들이 독에 담으면 무거워서 지게로는 감당할 수 없겠고, 목도에 실어서 흘리지 않고 성첩까지 올라가자면 발맞추는 목도꾸을 부려야 할 터인데 지금 성 안에는 목도꾼이 없습니다. 또 똥을 성첩에 쟁여놓은들 삭지 않은 날똥이 추위에 얼어붙어서 적병들이 성벽을 오를 때 바가지로 퍼서 끼얹을 수 없고, 곡괭이로 찍어서 똥얼음을 던져야 하겠는데, 얼음을 던지느니 돌멩이만 같지 못할 것이옵니다.

- p. 132. 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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