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여자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선생님은 너무 늙으셨어요. 정말 죄송해요."
"그냥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힘을 내고 이쪽으로 와요."
"안되겠어요. 저는 여기에 오면 - 선생님에게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쭤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군요. 모든 게 너무 달라요 - "
"무엇과 다르다는 겁니까?"
"죄송해요. 하지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커다랗게 한숨을 쉬고는 포와로를 바라보다가 얼른 눈길을 돌리고는 불쑥 내뱉듯이 말했다. "선생님은 너무 늙으셨어요. 저는 선생님이 그렇게 나이가 드신 분인지 몰랐어요. 저는 정말 무례한 행동을 하고 싶진 않아요. 그래요, 선생님은 너무 늙으셨어요.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서는 나방이 전등빛으로 빨려들 듯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포와로는 어이가 없어 입을 헤 벌리고 있는데, 현관문이 꽝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냅다 소리를 질러댔다. "나 원, 젠장...."
- p. 13.
. 1920년에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을 발표한 지 46년이 지난 1966년에 나온 여사의 소설. 2차대전이 끝난지도 20년, 영국 사회는 세금 인상과 복지 확대 등으로 인한 급격한 사회변화를 맞이했고, 과거의 모습들은 이제 모두 낡아 기억에서 잊혀져버렸다. 명탐정 포와로의 명성 역시도 이제는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다. 스코틀랜드 야드의 베테랑들과는 아직 연결고리가 남아있긴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포와로는 그저 늙디늙은 노인일 뿐이다. 크리스티 초기 단편인 '포와로 수사집'의 '베일에 쌓인 여인' 때만 해도 그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범죄자들이 그에게 접근하는 사건도 있었지만(물론 포와로는 그걸 멋지게 역이용해 사건을 해결한다) 이 이야기의 시작에 등장하는 젊은 여자는 그가 누군지 정말 모르는 채로 찾아왔다가 "선생님은 너무 늙으셨어요. 그렇게 나이가 드신 분인지 몰랐어요." 하고 도망가버린다. 저런, 저런.
올리버 부인은 벽 쪽에 붙여 놓여져 있는 탁자로 가서 타임즈 지를 집더니 몇 장을 넘겨 포와로에게 갖다주었다. "여기를 보세요. '안락한 2층짜리 공동주택에 세들 세 번째 여자 구함. 독방, 중앙난방, 얼스코트.' '공동주택에 세들 세 번째 여자 구함. 5파운드. 주말마다 독방 쓸 수 있음.' '네 번째 여자 구함. 리젠트 파크. 독방.' 요즘 젊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생활방식이에요. 하숙이나 여관보다는 훨씬 낫죠. 첫 번째 여자가 가구가 딸린 공동주택을 얻어서 세를 놓는 거예요. 두 번째 여자는 대개 첫 번째 여자의 친구가 되죠. 그리고, 다음에 그들은 아는 사람이 없으면 광고를 내어 세 번째 여자를 구하는 거예요. 그리고 보셨다시피, 네 번째 여자를 구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첫 번째 여자가 가장 좋은 방을 쓰고, 두 번째 여자는 셋돈을 조금 덜 내고 그 다음 방을, 세 번째 여자는 더 조금 내고 가장 나쁜 방을 쓰게 되죠." - p. 23.
. 그렇게 황당해하고 낙담하던 포와로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그의 몇 남지 않은 지인인 올리버 부인이다. 그녀는 그 여자가 사립탐정을 구하는 걸 알게 되어 자신이 포와로를 소개시켜줬다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올리버 부인 역시도 그녀가 대체 왜 사립탐정을 구하는건지,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건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포와로는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그 여자의 막막한 표정을 떠올리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을 찾아나선다. 그렇게 잡다하고 두서없으며 뭘 찾는지도 알 수 없는 추적으로 70여 쪽이 흘러간다. 사실 사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아파트를 공유하는 '세번째 여자' 문화에 관한 설명이라든가, 포와로와 올리버 부인의 눈에는 마냥 추저분해보이기만 하는 장발족 청년 등 변화하는 60년대 영국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는 70쪽이다. 마플 양에게 '깨어진 거울'이 있다면, 포와로에겐 '세 번째 여자'가 있는 셈이다.
포와로는 모닝 크로니클을 펼쳐 들었다. 그 신문에는 광고가 세 단이나 실려 있어서 찾아볼 면적이 가장 많았다.
털 코트를 처분하고 싶은 부인.... 자동차로 해외여행을 하고 싶은 승객들.... 아름다운 현대식 집 판매.... 하숙생.... 지진아.... 집에서 만든 초콜릿.... '줄리아, 잊지 마. 언제나 네 곁에 있는.' 그 광고가 좀 그럴 듯한 것 같았지만, 포와로는 잠시 생각해보고는 그냥 지나쳐버렸다. 루이 16세 시대의 가구.... 호텔 경영을 도와 줄 중년 부인.... '절박한 상황에 빠져 있음. 만나야 함. 반드시 4시 30분까지 공동주택으로 올 것. 우리의 암호는 골리어스.'
포와로가 "조지, 택시 - " 하고 외쳤을 때 현관 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외투를 걸치고 조지가 열어 놓은 현관문을 향해 나가는 순간 올리버 부인과 맞닥뜨렸다. 세 사람은 좁은 홀에서 서로 몸을 가누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 p. 301.
. 이 소설에서 포와로는 유독 혼란스러워 한다. 이 사건은 어떤 유형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는걸까. 나는 뭘 알고 있는걸까 - 뛰어난 솜씨로 증거들을 찾아내고, 증거가 쌓이면 거침없이 진실을 밝혀내던 과거와는 달리,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자신이 쓸데없는 사실들을 너무 많이 끌어모았다며 그 중에서 유효해 보이는 것을 끌어내 머릿속에 쌓아올렸다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무너뜨린다. '회색 뇌세포'라는 한마디면 끝나던 이전 소설들과 달리, 크리스티 여사는 포와로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그의 의식의 흐름을 하나하나 늘어놓는다(이런 여사의 시도는 바로 다음 소설인 '끝없는 밤'에서 완벽하게 완성된다).
. 아무튼, 그런 혼란을 거쳐 결국 사건은 해결된다. 포와로는 영 종잡을 수 없는 사건들 사이에서 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 범인을 잡아내고, 덫에 걸렸던 '세 번째 여자'를 구해낸다.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답게 그 와중에 인연을 맺어주는 솜씨까지 부리고 그녀로부터 감사의 입맞춤도 받는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어쩌면 자신도 바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포와로는 포와로다. 마플 양이 버트램 호텔의 향수에 머물지 않았듯, 포와로 역시도 버겁게 느껴지는 낯선 변화들을 헤쳐나가며, 회색 뇌세포와 멋진 콧수염과 함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알고 있었던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존 스털링플리트를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마치 행복한 어린 양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 "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방을 가로질러 에르큘 포와로에게 다가갔다.
"제가 너무 무례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제가 여기에 왔을 때 선생님은 아침식사를 하고 계셨죠. 저는 선생님이 저를 도와주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말했는데, 그건 너무 버릇없는 말이었어요. 그리고, 사실도 아니었죠...."
그리고 포와로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서 입을 맞추었다.
- p. 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