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조커 - 다카무라 가오루(문학동네) ●●●●●●●●●○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을 조커라고 한다면, 우리야말로 조커라고.
. 무려 3권, 1100페이지가 넘는 길고 긴 이야기 내내 다카무라 가오루는 아예 세계를 만들어가겠다는 것처럼 철저하게 세부에 집착한다. 물론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면 기업이나 경찰 내부의 세밀한 묘사 정도는 기본이지만, 두송실이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재료가 들어가는 사우어크라우트라든가, 유괴되었던 동안에 먹었던 음식의 브랜드를 가려내기 위해 음식 종류 별로 빵과 음료수와 통조림을 먹는 장면에 이르면 정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몇년 전 이뤄졌던 드라마화는 꽤 수월하지 않았을까. :)
. 그렇게 장르문학에서 으레 요구되는 수준을 넘어서서 극한까지 세부를 추구했기 때문일까. 결국 이 소설은 어느 순간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영역을 넘어서게 된다. 분명 시작은 사회의 변두리로 몰린 이들이 기업을 상대로 돈을 받아내기 위한 인질극이었지만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범죄는 더 큰 부조리 속에 소리없이 묻혀지고, 범인들은 범죄에 있어서마저 변두리로 밀려난다. 추리소설이라면 으레 가질법한 통쾌한 복수도 없고, 그렇다고 범인들이 파멸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초라한 모습으로 변두리에서 서성거릴 뿐이다.
"그나저나 한다, 우리 패에 이름을 붙이자고." 모노이가 말했다. "레이디 조커 어때?"
"웬 영어야?"
"누노카와가 일전에 자기 딸을 두고 조커를 뽑은 격이라더군. 그 때 문득 생각했어.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을 조커라고 한다면, 우리야말로 조커라고."
- 1권, p. 258.
.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탐정 역할이어야 할 고다 유이치로 역시도 마찬가지다. 전작인 '조시'에서 친구를 잃고 내심 마음에 두었던 상대에게는 제대로 된 접근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파국으로 치닫는 사건을 바라보고 관할서로 내려온 그는 이번 소설에서도 어중간하게 사전의 주변을 맴돌 뿐이다. 그 과정에서 유괴되었다가 풀려나온 회장의 호위를 맡게 되면서 사건을 해결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주기도 하지만, 정작 그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경찰물에 등장하는 외로운 영웅이 되는 것도 아닌 채 여기저기 치이고 밀려나다 그걸 견디지 못하고 일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고를 치다 결국 쓸쓸하게 침대에 누워 종결되지 않은 채 흘러가버리는 사건을 지켜볼 뿐이다.
. 지극히 정석적인 사회파 미스테리 걸작이었던 마크스의 산 이후, 다카무라 가오루는 전작 '조시'에서도, 이 소설에서도 이전작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조시에서는 작가 특유의 묘사를 통해 한 사람의 붕괴를 집착이라고 할만큼 세세하게 그려내고, 고다는 사건이 끝날 때까지 그런 친구의 주변만을 맴돌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번 소설에 이르면 아예 사건이 종결시키지도 않고 그저 묻히고 흘러가도록 놓아둔다. 작가가 끊임없이 붙들고 투쟁하면서 만들어낸 세계에서는 결말 역시도 적당한 타협의 산물이기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그 어디에 깔끔한 '끝', 그리고 '다음 시작'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말인지 - 타협 없는 치열한 투쟁의 결과 '해결'이라는 인위적인 타협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게 이 소설의 결말이고, 그렇기에 다카무라 가오루는 결국 미스테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니었을지.
"응. 좋지. 이 늙은이도 내년에는 여기를 처분하고 묘지기나 할 겸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집도 넓고 밭도 있으니까, 강아지 한 마리 데리고 사는 거야 일도 아니지."
"묘에는 이제 아무도 없지 않아?"
"언젠가 내가 들어갈 묘 아닌가. 손질을 해두어야지."
"어떤 동네인데?"
"하늘을 올려다보면 핫코다 산봉우리들이 보이지. 주위 산골짜기에는 예전에 말을 방목하던 완만한 목초지가 있고, 밭도 조금 있고. 나머지는 잡목림뿐이야. 넓어. 아주 넓지. 겨울에는 눈에 묻히고, 여름에는 눈이 시리는 초록에 묻히고."
"조용해 - ?"
"그럼, 조용하지. 전에 살던 이웃들도 이제 한 집도 안 남았어. 산파 집도, 마부 집도, 숯쟁이 조합장 집도, 심상소학교 잡무를 보던 사람의 집도...."
앉은뱅이탁자 너머에서 요짱이 잠깐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웃이 한 집도 없다니, 좋네" 라고 중얼거렸다.
- 3권, p. 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