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장 - 미야베 미유키 (북스피어) ●●●●●●●○○○
탐정은 어차피 그 정도의 존재에 불과했다.
"아빠, 내 몫까지 겐타로를 쓰다듬어 줘."
"응, 매일 그렇게 할게."
딸의 손을 놓을 때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 상처가 아물면서 생긴 딱지인 것이다. 그리고 또 피가 조금 흐른다.
- p. 252. 모래 남자
. '행복한 탐정'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도 어느덧 네번째 이야기까지 왔다. 묵직한 두께만큼이나 무거운 이야기였던 전작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서 가족과 헤어지고 회사와도 연을 끊어 더 이상은 마냥 행복할 것 같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역시 우리가 알던 스기무라 사부로답게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의 지인들과 재회하고, 크게 욕심내지도, 마냥 사양하지도 않으면서 주변의 도움을 받아 지역사회에 녹아들어 소소한 일들을 한다. 그러다 우연찮은 기회에 소소한 탐정사무소를 열기도 하고. 미야베 미유키는 행복한 탐정 시리즈의 시작부터 극히 현실적인 시선에서 경찰이 아닌 일반인이 사건에 뛰어드는 과정을 보여줬는데, 이 단편에서 주인공이 고향에서 탐정사무소를 여는 일련의 과정 역시 극히 현실적이다. 그래서 소소한 것이겠지만.
. 그래서 스기무라 사부로가 직장을 그만두고 이 일 저 일을 오가면서 탐정사무소를 열 때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단편 '모래남자'는 이 단편집에서 가장 눈에 띈다. 추리보다도 그 일련의 과정들이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미화도 과장도 없고, 낙관적일 것까지야 없지만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등장인물을 비참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사내보의 편집자였던 경력을 가지고 동네 상점가의 무가지를 배달하는 일자리를 얻기도 하고, 그러다 상점의 사장과 안면을 터서 상점가를 판촉하는 일을 하며 정착해가는 모습에서는 어딘지 얼마 전에 읽었던 '일상기술연구소'가 떠오르기도 했다. 직장을 그만두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암담하다고요. 프리는 두려우시다고요. 여기 스기무라 사부로 씨의 이야기를 참고해보세요 정도랄까. 개인적인 체험에 비춰보면 나 자신은 평생 큰 변화가 없는 일을 하는데다 비슷한 업무만 하는 동안 시야가 확 줄어든 느낌이 있었는데, 이 단편을 읽는 동안 이런 삶의 방식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편으로 경험삼아 편집 부서로 갈 기회가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싶은 생각에 아쉽기도 하고. 그렇게 이런저런 뜬금없는 지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단편이었다. 추리소설에 이런 감상이라니. :)
나는 접객 연수를 받고 계산대 일을 배운 후 매일 몇 개나 되는 피오피 광고를 제작했다. 'OO씨가 만든 시금치', 'OO원의 배', 생산농가의 책임자 사진도 붙인다. 해당 농산물의 영양가를 표시하고 추천 레시피를 함께 전시한다. 배달도 했는데, 지역 주민이니까 길을 압니다, 하고 부담없이 나갔다가 떠나있던 사이에 완전히 양상이 바뀌어 버린 길 위에서 헤매는 등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 한편, 배달할 때 배포할 '나쓰메 뉴스'라는 얇은 프리 페이퍼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편집도 담당하게 되었다.
- p. 235. 모래 남자
. 그렇게 주인공은 소소하게 - 적어도 아직까진 '행복한 탐정'이라는 부제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는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마냥 그런 분위기인 것만은 아니다. 흔히 소소한 사건하면 아기자기한 코지 미스테리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이 책의 사건들은 하나같이 길다란 그늘을 달고 있고, 읽고 나면 막막한 기분이 남는다. 주인공의 신변 이야기로 그런 무거움을 중화시키고는 있지만, 소소하지만 가볍지 않고, 훈훈함으로 눌러두긴 했지만 씁쓸함이 물씬 배어있는 것까진 어떻게도 가릴 수가 없다.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203호실의 문이 닫혔다. 뭔가 좀 더 할 수 있는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탐정은 어차피 그 정도의 존재에 불과했다.
- p. 96. 성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