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옷을 입은 사나이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그 빌어먹을 기린이 언제나 싫었다고."
. 초창기의 애거서 크리스티는 복잡한 트릭으로 승부를 보는 묵직한 작품과 로맨스와 모험이 곁들여진 즐거운 분위기의 작품을 번갈아가며 내곤 했는데, 크리스티의 네 번째 소설인 '갈색옷을 입은 사나이'는 후자에 속하는 작품이다. 전작인 골프장 살인사건의 복잡한 트릭과는 달리 이번 소설에서는 마음 푹 놓고 젊고 발랄한 처자의 모험담을 즐기면 되는데, 여기에다 영국을 벗어나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무대로 하고 매력 넘치는 악역에 '나쁜 남자'까지 로맨스와 모험을 즐길만한 최적의 설정을 쏙쏙 뽑아 갖추어 놓은 선물세트 같은 책이다. :)
.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앤 배딩필드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거리에서 우연히 추락사고를 목격하게 되고, 사고현장에서 맞닥뜨린 남자를 미행하던 중 그 남자가 떨어뜨린 쪽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 쪽지에는 '17·122 킬모든 캐슬'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고, 약간의 비약(^^;)을 거쳐 그 메모와 똑같은 이름의 배를 발견하고 전재산을 탈탈 털어 그 배를 냅다 예약해버리는데.... 하필 마침 그 배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가는 거였다나, 뭐라나. :) 그리고 배에 탑승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모험과 로맨스가 펼쳐지게 된다.
. 이런 앤의 모험담과 함께 유스터스 패들러 경의 일기가 번갈아가면서 등장하는데,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이런 구성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 아무튼 앤이 주인공으로서 진행과 로맨스를 담당하고 있다면 유스터스 경은 복선과 코믹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데, 특유의 비꼬기와 적당히 애처로운 말투로 성실한 비서를 골려먹거나 같은 배를 탄 멋진 대령을 질투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주인공을 꼬시려고 드는 등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 나오는 여러 조연들 가운데서 가장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다. 사실 앤의 모험담도 꽤 재미있었지만, 솔직히 유스터스 경의 일기야말로 이 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 읽고 나서 생각해보면 주인공인 앤 배딩필드는 크리스티의 판타지를 가득 담은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그다지 귀티가 난다거나 빼어난 미모라고 묘사되지는 않지만, 장난기 있는 매력적인 초록색 눈에 소설 내내 강조되는 늘씬한 다리, 똑부러진 성격이면서도 본인의 매력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알고, 무엇보다 가진 것은 없어도 절대 겁먹지 않고, 행동과 운명을 믿고 현실에 순응하려 들지 않는다. 별다른 직업이나 보장도 없으면서 한순간 떠오른 생각을 믿고 자신이 모아 둔 전재산을 남아프리카로 가는 일등석 티켓 한 장을 사는 데 모두 써버리고, 모험에서 만난 '나쁜 남자'와 한순간에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버리는 그런 모습을, 책상에 앉아 차근차근 소설을 써내려가던 크리스티 여사는 살짝 비웃으면서도 내심으로는 더없이 동경했던 게 아닐지.
p.s. 이 소설에 등장하는 레이스 대령은 '테이블 위의 죽음', '창백한 말' 등 크리스티 여사의 초창기 작품부터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등장하는 조연이다. 여느 소설에서든 모험을 좋아하는 멋지고 듬직한 남자로 나오는데 처음 등장하는 이 소설에선 아쉽게도(?) 결국 '나쁜남자'에게 밀리는 전형적인 실장님 역을 맡았다(결국 뒤의 작품에선 좋은 짝을 만나게 된다). 그러고보니 천애고아를 두고 벌이는 나쁜남자와 듬직한 실장님의 대결이라니 내가 본 게 100년 전의 추리소설인지 아니면 요즘 한창 케이블 어딘가에 나오는 로맨틱코미디인건지. :)
거이 파제트는 매사에 열심이며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서 뼈빠지게 일하는 내 비서로, 어느 모로 보나 본받을만한 친구이다. 한동안 나는 어떻게 하면 저 친구를 잘라버릴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자기 비서가, 노는 것보다는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새벽부터 일어나기가 다반사이며 품행이 방정하다면 쉽사리 해고시킬 수는 없는 노릇일 게다. 이 친구에게서 나를 즐겁게 해주는 요소가 있다면, 바로 그의 생김새이다. 그의 모습은 꼭 14세기 때의 독살자 같았는데 - 권력 유지를 위해선 악행도 서슴지 않았던 보르지아 가 사람들과 너무도 흡사했다. - p. 63. 유스터스 경의 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