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간의 논쟁, 그리고 크리스티의 완승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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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신은 - 당신의 존재를 눈에 띄지 않게 가리고 있다가 단지 한두 번 고개를 내미는 정도더군요 - 가정생활 같은 장면에서는 말입니다.




. 이제와서는 이 책의 범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범인을 둘러싼 논란들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혹시 난 모르겠는데? 하는 분들께는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읽고나서 오시거나, 아니 그냥 조심해주세요(....)


. 이 책이 처음 나왔을 시기에 이 책을 두고 벌어진 논쟁은 - 독자를 대놓고 기망했다는 주장에서부터, 힌트는 충분하고도 남았다는 주장까지 - 정말 유명하지만, 그러나 결국 90년에 지난 지금에 와서는(3년만 지나면 이 책이 쓰여진 지 100년이 된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이 이야기에서 범인을 감추기 위해 사용한 여러 기법과 복선들은 이제 와서는 단순히 추리소설의 영역을 넘어서서 영화에 아침 막장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반전을 사용하는 모든 창작물의 기초가 되고 있다. 덕분에 이제와서 이 책을 읽으면, 트릭 자체는 풀기 어렵지만 이야기의 분위기나 전개만을 보고 누가 범인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니(!!) 논쟁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완승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


. 하지만 이 책의 트릭은 정말 공들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범인을 짐작하는 것으로 넘어간다면 너무 아쉽다. 사실 책 속의 단서를 조합하고 함정을 피해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는 건 포와로의 추리를 듣고 나서도 쉽지 않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인물(심지어 사건과 아무 관련없는 이들조차도!!)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다 꼼꼼하게 짜여진 알리바이에, 그 당시에 정말 있었을까 싶은 신문물까지. 크리스티 여사가 포와로의 입을 빌려 끊임없이 힌트와 단서와 중간중간 정리를 제공하는데도 대충 느낌상 이 사람이 범인이겠구나 하는 정도를 넘어 범죄의 과정에 대해서는 감도 오지 않는다. 추리의 난도로 따지자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높은 축에 들 것이다.


. 또한 이 소설의 묘미는 범인을 알고 난 후에 범인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를 읽어나가는데에 있다. 범인을 알고 나면 범인이 완전범죄를 자신하며 느긋해 있다가, 포와로의 등장 이후 시시각각 자신에게로 향하는 의심을 풀기 위해 필사적으로 한마디 한마디를 고심해가면서 하고 있다는 걸 읽을 수 있다. 뭔가 갑자기 새롭게 단서가 발견될 때마다, 포와로가 갑자기 추리를 툭 던질 때마다 범인은 수사 방향을 돌리기 위해 뭐든 아무렇게나 던지고, 그렇게 범인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내는데도 포와로는 전혀 흔들림없이 반쯤은 범인을 비웃는 듯한 자세로 느물느물 강철로 된 포위망을 조여온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 포와로에게 항복하고 모든 걸 다 털어놓으면서, '포와로가 호박을 심으러 하필 이 동네로 왔는지 이가 갈린다'(번역본마다 조금씩 표현은 다르다)는 범인의 마지막 문장은 이런 게 카타르시스구나 할 정도로 묵직한 임팩트를 준다.




그(헤이스팅즈)는 면마다 '나는'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썼습니다. 그가 생각했던 것 - 그가 했던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 당신의 존재를 눈에 띄지 않게 가리고 있다가 단지 한두 번 고개를 내미는 정도이더군요 - 가정생활 같은 장면에서는 말입니다."

나는 그가 눈을 찡긋하는 바람에 약간 얼굴을 붉혔다. "그것을 정말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초조하게 물었다.

"나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까?"

"그렇습니다."

- p.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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