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 지식자랑들 사이에 두고두고 남을 걸작 하나

13호 독방의 문제 - 잭 푸트렐(동서문화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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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기계!
어느 직함보다도 이렇게까지 적절하게 그의 특질을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 13호 독방의 문제('사고기계 반 도젠 교수 단편집')는 추리소설을 시대적으로 구분한다면 첫 머리에 들어갈 소설이다. 물론 에드거 앨런 포가 나왔던 시기부터는 반세기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걸 기준으로 하면 거의 모든 초기의 추리소설이 다 그러니까 제외하고(^^;). 아무튼 포 이후로 몇 년에 한 번 정도 간간이 명맥을 이어오던 추리소설은 코난 도일이 홈즈를 등장시킨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그 첫 머리에 뤼팽이나 브라운 신부, 소년기자 를르타뷰와 함께 실릴 수 있는 게 반 도젠 교수다. 그는 교수 및 과학자, 철학자 등등의 온갖 직함을 가진 천재답게 주로 초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이는 트릭을 과학으로 규명하거나, 사건의 논리적인 오류를 짚어내어 이를 통해 범인을 찾아내며, '있을 수 없는 일 따위가 있을 리가 있소?'나, '불가능한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일세!' 라고 단언하는 게 입버릇이다. 일본드라마의 팬이라면 자연스레 외모 수려한 천재 물리학 조교수님이 떠오를 것이다. 이쪽은 딱히 잘생겼다는 묘사는 없지만, 대신 머리가 크다는 묘사는 있다. (응?)


. 아니나다를까 단편집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은 당시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과학적인 트릭을 사용하고 있어서 다른 요소는 거의 고려할 필요 없이 키워드 하나만 알면 사건이 풀려버린다. '수수께끼의 흉기', '불꽃에 휩싸인 유령', '빨강 실', '사라진 목걸이' 같은 대부분의 단편들은 독자와의 머리싸움이라기보단 지식싸움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법한 이야기들이고, 가끔 '수정술사'처럼 최신 과학기술을 이용하면서도 한 번 괜히 뒤틀어보는 단편도 있긴 하지만, 이제와서 보면 '재능의 낭비', '트릭을 위한 트릭' 이외의 평을 해주기 힘든 트릭이라 아무래도 그닥. 간간이 '정보누설', '갈색 윗옷', '완전한 알리바이'처럼 짤막짤막하고 읽는 맛이 있는 소설도 있긴 한데, 그런 책들은 또 트릭이 너무 단순하다보니 이걸 추리소설이라고 분류해줘도 되나 싶다. 예전에 한 때 유행하던 어린이 추리퀴즈 책들에 나오는 식의 트릭에 살만 좀 붙인 식이라고 하면 대강 감이 잡히지 않을까. :)


. 신기한 건 저런 고만고만한 단편들과 '13호 독방의 문제'가 같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13호 독방의 문제는 가장 처음에 쓰여졌는데도 뒤에 쓰여진 단편들에 비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데, 엄중하게 경비된 교도소에서 그 어떤 특별한 도구도 없이 일주일만에 탈옥해야 한다는 설정도 좋고, 시선을 돌리기 위한 눈속임과 위트 섞인 장면들이 적재적소에 잘 배치되어 있어서 지금 읽어도 상당히 세련된 걸작이다. 이 소설은 처음에 신문연재를 통해 파트를 나눠 발표했고 트릭을 맞춘 사람에게는 상금이 주어졌다고 하는데, 그런 구성이라 하루가 지날 때마다 단서와 함정이 차례차례 주어져 머리싸움을 끊임없이 유도하고 있다. 그러니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이 단편 하나만큼은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진지하게 읽어보길 권한다. 아무래도 상금까지 걸고 '독자와의 대결'을 선언했던 것이니만큼, 추리도 공정하고 독자의 승산도 꽤 높은 편이니까.



p.s. 아무래도 단편집은 평점을 주기가 참 애매한데, '13호 독방의 문제'를 위해 추가해두자면, 13호 독방의 문제는 동그라미 10개, 나머지 단편들은 0.5개에서 3개 정도의 수준이라 적당히 여섯 개로 타협했다. 그러니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13호 독방의 문제 만큼은 꼭, 다시, 제발(....) 읽어보세요. :)





세상 사람들은 반 도젠 교수를 '사고기계'라고 별명지어 부르고 있었다. 맨 처음에 이렇게 명명한 것은 신문사이며, 그것은 체스 전국 대회가 열렸을 때였다. 개회에 앞서 그는 오만하게 큰소리를 쳤다. 체스의 말을 처음으로 손에 잡는 사람이라도 논리적인 사고 능력만 유효하게 회전시키면, 일생을 체스판 연구에 바친 전문기사를 상대한다 해도 쉽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대회에서 아주 훌륭하게 입증해 보였다. 사고기계! 어느 직함보다도 더 한층 이렇게까지 적절하게 그의 특질을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 '13호 독방의 문제', 첫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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