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관 살인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해문) ●●●●●●●●○○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웅덩이 속의 물 한 방울만큼 생명에 가득 차 있는 것도 없단다.
. 드디어, 10년 만에, 12번째로 마플 여사님의 차례가 왔다. 그 사이에 포와로는 절반인 여섯 작품에 등장했고, 배틀 총경과 토미-터펜스 부부는 각각 두 번씩 등장했고, 심지어 탐정이 아닌 번들도 두 번이나 나왔는데 마플 여사님은 목사관 살인사건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등장한다. 상당히 늦은 편이긴 하지만, 대신 첫 작품부터 완성도가 높다. :)
"그건 그다지 좋은 비유가 못 되는구나, 레이몬드." 마플 양이 활달하게 말했다.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웅덩이의 물 한 방울만큼 생명에 가득 차 있는 것도 없단다."
"생명 - 예, 일종의 생명이지요." 그 소설가도 인정했다.
"그것은 똑같은 것이야. 정말. 그렇잖니?" 마플 양이 말했다.
"자신을 스스로 괴어 있는 물 웅덩이의 주민으로 비유하고 있는 건가요, 제인 아주머니?"
"오! 레이몬드, 너도 최근에 쓴 작품 속에서 그 비슷한 얘기를 한 것 같은데?"
영리한 젊은이들은 자기의 작품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인용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레이몬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달라요." 그는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인생은 결국 어디서나 비슷비슷한 거란다." 마플 양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 p. 194
. 조용하고 한적하다 못해 고여있는 물웅덩이로까지 묘사되는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이지만 마플 여사님의 말씀처럼 오늘도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을은 늙고 괴팍한 예심판사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과 런던에서 흘러들어 온 멋진 예술가와의 추문으로 조용할 새가 없다. 어느 마을에나 있을법한 노부인들과 하인들은 이 추문에 나름대로 살을 붙여 끊임없이 재생산하느라 정신이 없고, 마음의 중심이 되어야 할 목사조차 아름답지만 목사 사모로서는 철없는 부인과 끔찍한 요리 실력을 가진 하녀, 끊임없이 서로를 뒷담화하는 교구민들 때문에 매일매일 골머리를 썩는다. 그러던 중 하필이면 목사관에서 살인사건이 터지고, 결국 무엇이든 보고 듣고 알고 계신 마플 여사님께서 사건에 친히 뛰어드시게 된다.
.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 작은 시골마을을 마음에 꼭 들어했던 듯, 다른 소설에선 탐정이나 주요 조연들을 제외한 나머지 캐릭터들이 일회성인 것과는 달리 세인트 메어리 미드 마을은 이후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활동 후반기까지 주요 무대가 되고, 마을 사람들도 꾸준히 등장한다. '화요일 클럽의 살인'과 '잠자는 살인' 등 앞으로 꾸준히 나오게 될 조카인 레이먼드 웨스트와 마지막 작품인 '복수의 여신'까지 마플 여사님의 든든한 친우로 등장하는 헤이독 의사, 클레멘트 목사와 사모인 그리셀다, 마을 노부인들의 근황을 일일이 달아줄 정도로 애정을 보이는데, 특히 후기작인 '깨어진 거울'에서는 60년대 영국의 현대화(?) 바람을 타고 변화하는 마을의 모습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니 모쪼록 마플 시리즈만큼은 이 소설로 시작하기를 추천한다.
. 더구나 마플 여사님의 첫 등장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 전체를 대상으로 봐도 상당히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기도 하다. 기본을 지키면서도 딱 한끗을 비틀어낸 트릭에다 눈에 확 들어오는 개성적인 인물들, 그리고 그들에게 고루고루 역할을 분배해 여기저기 단서와 함정을 밸런스 있게 배치한 것까지 본격적인 크리스티 여사님의 전성기를 여는 시작점이라고 이야기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의 명작. 거기다 작가 혼자 앞서나가지 않고 독자들에게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해서 탐정과 독자가 거의 같은 눈높이를 가지고 있다보니 주어진 정보를 끈기있게 조합하다보면 작가와 독자의 대결이 가능하다는 것도 매력적. 이래저래 새 캐릭터의 등장에 맞춰 힘을 잔뜩 주고 집중한 모습이 보여서 간만에 감탄하면서 읽은 작품이었다. :)
소설에서는 언제나 전혀 뜻밖의 인물이 범인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러나 실제 생활에 그 법칙이 적용되는 예는 거의 없답니다. 실제 생활에서는 가장 명백한 일이 진실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 p. 270.
p.s. 목사관 살인사건은 제럴드 맥이완 여사가 주연배우를 맡아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는데, 미스 마플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다 시즌 1의 1화여서 잔뜩 힘을 주고 만들었는지 캐스팅이 어마어마한다. 닥터 후에 나오는 레이첼 스털링에다 젠틀맨 리그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로 유명한 제이슨 플레밍, 어르신이 왜 여기 나오세요 급인 데릭 제이코비 옹(해외드라마에 관심이 없더라도 글래디에이터의 강직한 원로원 의원인 '그라쿠스'라고 하면 다들 알지 않을까)에, 무려 아직 피부가 뽀송뽀송하고 머리숱이 많던(!!!!) 시절의 마크 개티스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니 배우들의 팬이라면 한 번 챙겨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