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이전, 폴 오스터의 첫 '추리' 소설

스퀴즈 플레이 - 폴 오스터(열린책들)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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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뉴욕이 좋아.
뉴욕이 그런 대로 살만할 때는 1년에 고작 두세 달뿐이거든.
공교롭게도 5월은 그런 달 가운데 하나지.




"이봐. 내 '뉴요커' 정기 구독권을 가로챌 속셈이라면 잊어버려. 2월에 기한이 끝났고, 계약도 갱신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뭘 가로채려는 게 아니야. 다만 네놈이 떠나는 꼴을 보고 싶을 뿐이지. 채프먼 사건에서, 조지와 주디 채프먼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 손을 떼."

"지난 사흘 동안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더군. 내 건강을 걱정하면서. 나더러 휴가를 떠나는 게 좋다는 거야. 하지만 나는 뉴욕이 좋아. 뉴욕이 그런 대로 살만할 때는 1년에 고작 두세 달뿐이거든. 공교롭게도 5월은 그런 달 가운데 하나지. 11월에 다시 전화하는 게 어때? 그때쯤에는 네놈 이야기에 좀더 흥미를 갖게 될 텐데."

"11월에는 너무 늦을 걸. 그때쯤 너는 이미 죽어 있을 테니까."

"양귀비도 죽겠지. 월드시리즈도 끝날 테고, 새들은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을 거야.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 p. 190.





. 1970년대는 당시 20대였던 폴 오스터에겐 가혹한 시기였다. 유조선을 타는 것부터 시작해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의 의뢰를 받고 대필작가가 되기도 하고(물론 제대로 된 돈을 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극작가가 되어 자신이 쓴 희곡이 처참히 망하는 걸 지켜봐야 할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길을 잘못 들어(?) 일확천금을 노리고 야구 보드게임을 만들기도 했지만, 1970년대면 이미 아타리를 중심으로 컴퓨터 게임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에 보드게임이 성공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던 20대의 폴 오스터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단 두 달만에 써낸 소설이 이 스퀴즈 플레이다. 물론 그에게는 지극히 가혹한 시기였던 만큼, 대부분의 출판사에서 외면당했고 당연히 돈도 되지 않았다. 정작 이 책으로 돈을 번 것은 수년여가 흘러 더 이상 돈에 쪼들리지 않게 된 때였고 그나마도 900달러(오늘날로 치면 300만원 정도다)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뭔가 씁쓸한 이야기다.


. 하지만 이 소설은 실제 읽어보면 모두에게 외면당한 것치고는 나쁘지 않다....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재미있다. 전설적인 야구선수였지만 교통사고로 은퇴했다가 방송인으로 인지도를 얻어 이제는 정계 진출을 준비 중인 조지 채프먼. 그는 자신이 협박을 받고 있다며 주인공에게 조사를 의뢰하지만, 정작 사건을 해결할 만한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고 주인공의 질문에도 모르겠다는 대답으로 일관한다. 그의 태도에 의아해하면서도 어쨌든 그의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하자마자 조사를 그만두라는 온갖 협박과 압력이 들어온다. 하드보일드물 답게 주인공은 냉소와 비꼼, 맷집과 주먹으로 사건의 중심에 꾸준히 접근해가지만, 진실에 도달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처음 사건을 맡았을 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진상이었다는, 지극히 정석적인 추리소설이다.





아무 성과도 없었다. 나는 채프먼이 나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게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협박장을 받고 정말로 놀랐지만, 내가 거기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인 양 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사건을 부탁하면서, 동시에 그 사건을 낚아채고 있었다. 나는 값비싼 시계를 선물로 받았는데 그 시계에 바늘이 없는 것을 알고 당황한 사람 같은 기분을 느꼈다.

- p. 22.





. 주인공의 입담과 유머는 훌륭하고, 액션에는 타격감이 있다. 중심이 되는 줄거리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삶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이야기에 녹아들어 여운을 남기고, 마지막엔 적당한 메시지가 남는다. 추리소설을, 그 이전에 소설을 쓰는 '방법론'을 잘 아는 사람이 썼다는 생각이 드는 노련한 소설이다. 물론 챈들러나 맥도날드 같은 거장들과 비견될 수준에야 못미치겠지만, 웬만한 작가들 수준은 되고도 남는 작품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 시기에는 일본 정도를 제외하고는 추리소설이 마이너한 장르로 전락해 외면받고 있었던 때였던데다, 이 때의 폴 오스터는 완전 무명작가였기 때문에 이 책은 완전히 묻히고 말았다. 오죽하면 사회 비판이나 인물의 심리묘사, 가족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부분들은 좋으니까 군더더기 같은 탐정 부분만 빼면 출간해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는데 탐정 소설에서 탐정 부분을 대체 어떻게 빼겠냐고(....) 그게 됐다면 폴 오스터의 이름을 알린 첫 소설은 10년 후의 '뉴욕 3부작'이 아닌 이 소설이 되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외면당한 게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묻혀서 천만다행이었다 싶을 정도로, 챈들러의 소설과 닮아도 너무 닮긴 했으니까. :)





이 작전의 요체는 2루와 3루에 최고의 주자가 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작전이 잘 되면 전광석화처럼 빠르다. 월턴이 초구를 던지려고 투구 동작에 들어간 순간, 작전이 가동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웹스터와 터너가 한 쌍의 뜀쥐처럼 베이스라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고, 코스텔로는 번트 자세를 취했다. 자살 스퀴즈였다. 이 작전이 실행되면 막을 방법이 없다. 코스텔로는 마운드 오른쪽으로 멋진 번트를 쳐냈다. 월턴이 공을 집어들었을 때쯤 웹스터는 이미 홈플레이트를 지나 동점을 만들고 있었다.

월턴에게 남은 선택은 공을 1루에 던져서 코스텔로를 아웃시키는 것뿐이었고, 그는 코스텔로보다 서너 걸음 먼저 느긋하게 1루에 공을 던졌다. 하지만 그는 터너가 3루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터너가 쏜살같이 3루를 돌아 홈으로 달리고 있는 것을 1루수가 보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1루수가 홈으로 공을 던졌고, 터너가 슬라이딩을 했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터너는 세이프되었고, 경기는 끝났다. 이중 스퀴즈 플레이.

- p.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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