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버리다

[ 2. 낡은 속옷 하나 ]

by 시우경희

반팔을 입어도 움츠러들지 않을 만큼,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다.


몸이 기분 좋게 나른해진다. 고양이들도 햇볕이 들어오는 데크에 옹기종기 자리 잡고 몸을 늘어뜨리고 있다.

불룩하게 솟았다가 가라앉는 야꼬의 배가 코고는 소리와 박자가 딱 맞는다.

데크에 늘어진 아이들을 보니 내 눈꺼풀도 슬며시 내려온다.



아직은 쌀쌀함이 다 가시지 않은 채 드디어 새로운 계절이 문지방을 넘고 있다.


이 온도, 부드럽게 살랑이는 바람의 촉감을 되도록 길게 간직하고 싶다.


무거운 마음도 이제는 가는 계절의 손에 쥐어 보낸다.








도서관에 대출 신청을 해 놓은 책이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울렸다.


어서 다녀와야겠다.


데크에서 들어와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들을 바라보는데, 오늘 역시나 입을 만한 것이 없다. 나도 모르게 앙다물어진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루 이틀도 아닌데 집 밖에 나갈 때마다 괜한 고민을 한다.


어제 세탁해 걸어 놓은 옷을 꺼내 입었다.



요즘 통 움직이지 않았더니 점점 살이 불어나고 있다. 고무줄 바지임에도 엉덩이가 꽉 끼고 허리춤에 여유가 없다.


옷 위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옆구리 살을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집으니 그 두께가 상당하다.

'살이 찌고 있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네?'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재작년, 10kg을 덜어냈는데 일 년 사이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니 움직일 때마다 살들이 겹치는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체중이 더 늘어난 것 같다.

체중계에 올라가기가 두려워서 재보지 않고 있다.


재킷 단추가 여유 있게 잠기던 때가 아득하다.

그래도 한 계절쯤은 이 몸에 관대해지고 싶다.



지금은 주변의 수많은 것들을 비워내는 게 우선이다.



물건을 많이 사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집 안을 대충 둘러보니 버리지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는 것들이 꽤 있어 보인다.



폭신한 바지와 연한 회벽색 아우터를 걸치고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아차! 반납할 책을 깜빡했다. 다시 현관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는데 새하얗던 운동화에 거뭇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것에 시선이 잠시 멈췄다.



다시 도서관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오늘 계절을 다듬는 첫날인데 어떤 걸 비울까? 살짝 설레는 마음이 올라왔다.

조금 고민됐다. 그러다 조금 전에 옷방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입고 나온 낡고 늘어진 속옷이 떠올랐다. 불어난 몸보다 더 늘어난 원단이 탄력 없이 흐물거렸다.


입으면 따로 노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심하게 불편하지는 않았기에 사적인 감촉을 무시했다.

손으로 살짝 만져보니 불룩한 옆구리 살이 보정 없이 그대로 툭 튀어나와 포동하게 잡혔다.

그래 오늘 불어난 살과 함께 늘어난 너와 이제는 이별을 해야겠다.



예약해 놓은 도서를 받아 들고 나서는데 도서관 마당으로 떨어지는 햇살이 따사롭다.



집으로 돌아와 낡고 늘어진 속옷을 벗어 돌돌 말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그 짧은 순간에 몸을 옭아매던 지난 계절의 묵은 감정 하나가 딸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헐어버린 기운이 떨어져 나가는 듯 시원했다.



야꼬의 털을 골라주려고 데크에 앉아 빗질을 했다. 한 주먹으로 잡기 힘들 정도로 수북하게 죽은 털들이 한 움큼 나왔다.

'야꼬야, 너도 시원하지?'

야꼬가 얼굴을 들어 올리며 눈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깜빡인다.


늘어난 고무줄만큼이나 헐거워진 하루가 사소한 비움으로 단정해진 것 같다.

하루에 하나씩 비우는 중이다.


오늘은 속옷 하나.

이걸로 충분하다.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