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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발적 무급노동자 Sep 27. 2024

공무원 조기 퇴직자가 반 백수로 행복하게 사는 법

반대쪽에 남은 흔적을 지워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한창 일할 나이에 그만 두면 뭐 하려고?"

"공무원 그만두고 무슨 일 하고 있으세요?"


위의 두 질문은 공무원 그만 두기 전과 그만두고 난 후에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그들이 던진 질문에, 나는 그들이 원하는 '뻔한' 대답을 들려주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뻔한' 대답이란, 많은 사람들이 으레 생각하는 이런 답변이다.

"더 좋은 자리가  생겨서요."

"투자한 게 잘 풀려서 경제적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직한 직장에서 더 좋은 대우받으며 잘 살고 있습니다."


40대는 누가 봐도 열심히 일해야 하는 나이이다. 그게 우리 사회의 미덕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에 공직을 그만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공무원을 그만둔 나는 정말 '일'을 그만둔 것일까? 아니다, 나도 내 나름대로의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중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범 답안에 해당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일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에 의해 엄청난 해악이 발생한다' - 버트런트 러셀(Bertrand Russel)


내가 공직에 있으면서 했던 일은 러셀 선생이 말한 '근로'였고, 나는 그저 '엄청난 해악'을 피해서 공직을 그만두고 다른 종류의 일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스스로를 위해 변명하고 싶다. 해악을 피해 안전지대로 피신은 잘했지만, 월급 마약을 끊음으로써 생기는 물질적인 결핍까지 무시하며, 지금 하고 있는 반(半) 백수 생활을 마냥 찬양할 수는 없다. 지금 내가 있는 안전지대는 물질적으로는 그다지 풍요롭지 않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외국에서 혼자 아이 뒷바라지를 하는 일이, 물질적 결핍을 감내하며 내가 공무원을 그만두고 찾은 일이다. 아니, 공무원을 그만두고 찾은 일이 아니라, 이 일을 하기 위해 공무원을 그만두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이 일도 쉽지만은 않다. 외국 땅에서 혼자 아이 뒷바라지(혹자는 독박 육아라고도 하더라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하는 건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고, 공무원을 대신할 본캐를 만드는 작업은 기대만큼 잘 되고 있지 않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 매달 25일이 되면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에 찍히는 각종 자동이체 출금 문자를 확인하고 나면, 이러다가 언젠가는 러셀 선생이 말한 '근로'를 하기 위해 다시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건 아닌지 덜컥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런 게 쓸데없는 고민이란 걸 안다. 큰돈을 요구하는 사건 사고(?)만 터지지 않는다면, 내가 다시 생업 전선에 끌려 들어갈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고, 외국 땅에서 혼자 하는 아이 뒷바라지의 난이도는 지난 20여 년간의 직장 생활에 비교하면 비기너 레벨 수준에 불과하다. 그리고 공무원 그만둔 지 아직 일 년도 되지 않았다. 지금은 새로운 '본캐'가 아닌 '부캐'로만 살아도 괜찮을 때다. 


그러면 나는 왜 이런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가끔 하며, 지금 하는 일도 쉽지 않다고 소심하게 불평(?)을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다니기 싫던 회사 그만두고, 하고 싶었던 일만 하는 지금 충분히 100% 만족하며 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생각 끝에 얻은 정답은, 그냥 내가 아직은 직장인의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런 거였다. 지난 20여 년 동안 '근로'를 하며 그 대가로 나는 매달 월급이란 걸 받았다. 일의 결과물은 돈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직장인의 습성이다.

  

'일을 하면 돈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이것이, 지난 20여 년 동안 직장 생활하며, 당연하게 생각해 온 사회 법칙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은 하고 있지만(물론 다른 종류의 일이긴 하지만) 돈 대신 다른 걸로 보상받고 있다.

돈 대신 생기는 '다른 것'은 돈 보다 훨씬 가치 있지만(최소한 나에게만큼은!), 손에 만져지지 않아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평을 했던 거다. 이런 어리석은 녀석!


어리석음을 깨달았다고 사람이 바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불평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맞은편에 남아있는 직장인으로서의 나의 흔적을 아직 완전히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흔적을 지워야, 행복한 반 백수의 삶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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