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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발적 무급노동자 Sep 06. 2024

조금 일찍 퇴직하면 달라지는 것들

'월급 마약'을 끊으면 나타나는 좋은 점과, 약간의 부작용

모든 직장인들의 로망인 조기 퇴직을 몸소 실천한 지도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앞 글에서 이미 적었지만, 나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내가 잘 나서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게 아니란 사실을 잘 안다. 사람들이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돈'이다. 월급은 '마약'과도 같아서 쉽게 끊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마약'을 과감히 끊었다. 얼떨결에 '소녀 가장'이 되어버린 아내 덕이 크기는 하지만, 이런 도움이 있어도 마약을 끊지 못하는 사림이 대부분이다. 오늘은 '월급 마약'을 끊으면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적어보려 한다.




신체 변화: 월급 마약이 주는 가장 큰 위험 요인은 스트레스이다. 사람들이 공무원들은 스트레스도 없이(또는 적게 받으며) 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소설 <안나 까레리나>의 유명한 첫 구절을 빌어 말하면, "모든 직장인이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제각기 다르다." 그렇다, 공무원도 여러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히 나 같은 경우는 '영혼'을 담아 일하고 싶어도 '영혼 없이' 일해야 할 때,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월급 마약'도 진짜 마약처럼 몸에 해로웠나 보다. 월급 마약을 끊으니 피부도 거짓말처럼 예전에 비해 조금 탱탱해졌고(노화 진행이 늦춰줬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지만), 소화도 잘 된다. 고혈압 경계선을 넘보던 혈압도 정상 수치로 되돌아왔고, 밤에는 잠도 잘 잔다. 신체 변화 점수는 만점이다.


통장 잔액: 항상 우상향을 달리던 통장 잔액 그래프는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주머니가 조금씩 가벼워지니 주변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지기가 힘들다. 술 마시자고 친구 불러내는 것도 부담이고, 좋아하는 와인을 사다 쟁여 놓는 즐거움도 이제는 쉽게 누릴 수가 없다. 가끔 만나는 조카들에게 선뜻 용돈 주는 것도 부담스러워,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에는 평소에 쳐다보지도 않던 재테크 관련 정보를 구하려고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하지만 굳이 자기 위안을 해보자면, 사는 게 어렵지는 않다. 예전보다 조금 더 긴축 재정을 할 뿐이다. 나는 나의 존엄성(?)이 침해받지 않을 정도로만 돈이 있으면 된다는 주의다. 그래서 늘어나지 않는 통장 잔액을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시간: 통장 잔액과는 달리,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상승 곡선을 그렸다. 당장 여유 시간이 많아지니 갖은 유혹이 다 생긴다. 구독 중인 OTT 채널에 새로 뜬 요즘 핫하다는 드라마도 보고 싶고, 그냥 멍하니 소파에 누워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쳐다보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마냥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것이 아직은 이대로 그냥 '손 놓고' 마음 가는 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끔 아들이 이렇게 물어본다. "아빠는 왜 다른 아빠들처럼 회사에 안 다녀?" 뼈 때리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질문에 부끄럽지 않게 대답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드라마나 보고 소파에 누워 멍 때리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린 결론. 진정한 '시간 부자'가 되기는 쉽지 않다. 직장에 출근은 하지 않더라도, 모든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회 활동: 통장 잔액만큼이나 확연히 줄어드는 게 바로 사회 활동이다. 업무 관계로 얽혀 있던 사람들과 만날 일이 확연히 줄어드니, 밖에 나갈 일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밖에서 사람 만나는 일이 줄어드니 술 마시는 빈도도 많이 줄고, 덕분에 몸도 좋아지는 것 같다. 지금까지 말한 건 장점이고, 굳이 단점을 꼽자면 가끔 외로워질 때가 있다. 집에서 살림하고, 남는 시간에는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으니, 어느 사회심리학자가 말한 '사회적 소속에 대한 욕구'가 결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행인 건, 나는 이런 류의 욕구에 대한 '욕구'가 그다지 강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다는데, 나는 '반(半) 사회적 동물 같다.


가족 관계: 퇴직 후 가장 좋아진 게 가족 관계다.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으니, 예전 같으면 짜증 섞인 말투로 대꾸했을 일들에 오히려 웃음으로 대응한다. 그래서 부부 싸움 하는 일이 정말(!) 많이 줄었다. 아들과는 아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 빼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붙어 있으니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아들이 엄마와 떨어져 생활하니 많이 마음에 걸린다. 아직까지 모자 관계는, 우리 부자가 말레이시아 오기 전과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고(가끔 보면 오히려 좋아진 것도 같다), 이대로만 살아진다면 더 좋아질 것이라 믿는다(희망한다).




가끔 '월급 마약'이 당길 때가 있다. 원시 수렵사회가 아닌,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사회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돈이 있으면 정말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래서 정말 가끔 월급 마약이 그리워지지만, 그때뿐이다. 내가 복용(?)하던 월급 마약은 중독성이 덜했는지, 어렵지 않게 끊을 수 있었고 끊은 후에 금단 증상도 덜하다.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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